진짜 예수쟁이
안석수 목사
*본문/ 행 10:3-5
사도행전 10장2절은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단 한 문장에 불과하지만, 고넬료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얼마나 신실하게 사는 사람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밝혀 줍니다. “경건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다” “많이 구제하다” “항상 기도하다” 여기에 다른 수식어를 덧붙이면 사족이 될 정도로 고넬료에 대한 완벽한 단 한 문장의 평가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9장33절입니다.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에 누운지 여덟 해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다의 애니아에 대한 단 한 문장의 설명입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의 설명 앞에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중풍병자 당사자인 애니아는 물론이요, 그의 가족을 포함하여 주위 사람들의 고통과 괴로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9장36절입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드로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바에 살던 주님의 여제자 다비다에 대한 설명도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다비다를 설명하는데,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라는 한 문장의 설명외에 다른 첨가의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룻다의 에니아도, 욥바의 다비다도, 가이사랴의 고넬료도, 성경은 단 한 문장으로 그들을 소개하고 또 평가합니다.
이것은 그 세 사람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완용에게 어찌 장점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에게 붙어 있는 단 한 문장의 내용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설령 그의 장점이 하늘을 찌르고 그의 재능이 바다를 가른다 한들, 이 한 줄의 문장 앞에서 대체 무슨 소용이었겠습니까?
이완용은 자기 사욕을 위하여 나라를 팔아먹으면서 이 땅의 주권과 평화를 유린하던 비슷한 시기에, 지구 반대편에서 국적을 초월한 인류애로 세계 평화를 위하여 헌신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190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스위스의 앙리 뒤낭이었습니다. 그에겐들 어찌 결점이 없었겠습니까? 앙리 뒤낭으로부터 상처받은 사람이 왜 없었겠습니까? 1882년 이완용이 과거에 급제하기 이전에 앙리 뒤낭은 이미 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제분회사를 경영할 정도로 국제적인 사업 수완을 지니고 있었으니, 어찌 그의 마음이 천사 같기만 했겠습니까? 그러나 온 세계인이 그에게 부여한 “국제적십자 운동의 아버지”란 단 한 문장의 평가 앞에서, 그의 모든 결함과 단점마저도 그의 아름다움과 장점으로 바뀌었습니다.
과거의 인물, 그것도 역사적인 인물만 한 문장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인간 역시 누구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단 한 문장으로, 심한 경우에는 단 한 단어로 표현됩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 아무나 한 명을 지금 머릿속에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그 사람을 책 한 권 분량의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A4용지 한 두 페이지 분량입니까? 가령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알고 있는 제3자에 대하여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책 한 권 분량으로, 혹은 A4용지 한 두 페이지 분량으로 대답합니까? “아, 개? 사기꾼이야!”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될 사람이야” “이, 그분! 존경스러운 분이야!”이처럼 우리들 역시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단 한 문장이나 한 단어로 기억하고, 또 평가하고 또 소개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 역시 우리들을 단 한 문장이나 단 한 단어로 기억하고, 또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 주위의 사람들은 어떤 내용의 한 문장으로 우리들을 평가할까요? 그 해답은 그들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들이 추구해 온 우리들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셨다면, 우리들에 대한 단 한 문장의 평가는 분명히 긍정적인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해 오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의 기대와 달리 우리들에 대한 단 한 문장의 평가는 부정적인 내용일 것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살아도, 살아생전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 해도, 우리의 이력서에 페이지를 넘겨 가며 화려한 경력을 기술한다 해도, 세상 사람들은 단 한 문장으로 이루를 기억하고,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단 한 문장으로 우리의 일생을 평가하실 것입니다.
인생이란 그 짧은 한 문장의 평가를 위한 대장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든, 이제부터는 함부로 아무렇게나 살 수 없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진정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할 것이고,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경건하여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단 한 문장의 평가를 받을 때, 우리의 삶이 끝나는 순간,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어느 날 고넬료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환상 속에 나타난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욥바의 해변에 위치한 무두장이 집에서 유숙하고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이사랴애 주둔하고 있던 이방인 고넬료는, 유대인 영향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를 행하며 항상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해 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경건한 고넬료가 생명의 복음을 접할 수 있게끔,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도록 역사하신 것이었습니다.
고넬료는 그 직후 집안 하인 2명과 경건한 부하 1명, 도합 3명을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 보냈습니다. 그때까지 베드로를 만난 적이 없음은 물론이고 베드로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의 남쪽 욥바에 와 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또 욥바의 수많은 집 가운데, 베드로가 해변의 무두장이 집에 유숙하고 있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고넬료로 하여금 환상을 통해 욥바의 베드로를 청하게 하시고 생명의 복음을 접하게 하신 것이야말로 신비스러운 역사이었습니다.
백주 대낮에 베드로는 옥상에서,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18장은 마무레에 있던 아브라함이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난 내용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장막 문 앞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시간은 “날이 뜨거울 때”였습니다. 중동의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한 낮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기도하고 있지도 않았으며, 환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주 대낮에 자신의 집 문 앞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즉각 알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특정 장소, 특정 시간, 특정 상황 속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집 문 앞에도 계시고, 우리 집 옥상에도 계시고, 우리의 근무지에도 계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낮 12시에도, 오후 3시에도, 한밤중에도 계시고, 새벽에도 계십니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에도, 우리가 잠들었을 때에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또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마저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 자신의 생업을 포기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많은 구제를 행하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애니아, 다비다, 고넬료 세 사람의 공통점은 , 그들 모두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온 세상이 분주한 시끄러운 대낮에 자기 집 문 앞과 무두장이의 집 옥상, 그리소 자신의 근무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뵐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특정 장소, 특정 시간, 특정 상황 속에 갇혀 있는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듣고 보려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듣고 볼 수 있습니다. 메일 아침 동터 오는 햇빛 속에서, 저녁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 속에서, 겨우내 얼었던 땅을 헤집고 돋아나는 새싹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에 대해 그처럼 열린 귀와 눈을 지닐 때 우리는 문자로 기록된 성경 말씀의 깊은 뜻을 비로소 깨닫고 실천할 수 있을 것이요, 그 결과 사람들은 우리를 가리켜 단 한 문장으로 이렇게 평가할 것입니다.
“저 사람은 진짜 예수쟁이다.”
祈禱)
하나님 아버지, 룻다의 애니아도, 욥바의 다비다도, 가이사랴의 고넬료도, 한국의 이완용도, 스위스의 앙리 뒤낭도, 단 한 줄의 문장으로 기억되고, 또 평가 받습니다. 칠팔십을 살든, 백 년을 살든, 우리를 스쳐가는 모든 시간들은, 오직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압축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특정 시간, 특정 장소, 특정 상황 속에만 가두어 두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하지 말게 하옵소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와 하나님을 뵙는 눈을 주옵소서. 그 눈과 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자로 주신 성경말씀의 참 의미를 바르게 깨닫고, 삶으로 실천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생이 끝나는 순간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에 의해 우리의 일생이 “저 사람은 진짜 예수쟁이다.”라는 영광된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