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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이는 것 너머

  • 총회자료실
  • 관리자
  • Nov 24, 2017
  • 조회 8582

보이는 것 너머

(안석수목사)

*본문/ 9:26-31

 

스스로 프랑스의 황제가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함으로 그 기세가 꺾였고, 181454일 파리를 점령한 유럽 연합군에 의해 지중해의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나 9개월 후인 18152월에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은 20여일 만에 파리에 입성하여 다시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리고 4개월이 지난 18456월 나폴레옹은 125천 명의 프랑스 군을 이끌고, 영국의 웰링톤 장군이 지휘하는 유럽 연합군과 유럽 대륙 지배권을 놓고 벨기에의 남동쪽 워털루 교외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워털루 전투입니다.

1815618일 아침, 나폴레옹 군이 먼저 연합군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함으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세는 프랑스 군에게 유리하게 보였습니다. 마침내 오후 6, 마지막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근위사단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백전무패를 자랑하던 전설적인 나폴레옹 근위사단, 격전 끝에 웰링톤 진영 산등성이 능선을 장악하였습니다. 나폴레옹 진영에서 볼 때 그것으로 전투는 끝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산등성이 반대쪽에 포진해 있던 연합군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게다가 뒤늦게 전투에 합류한 프로이젠군의 협공으로 프랑스군은 궤멸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흘 뒤인 622일 나폴레옹은 대서양의 고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영국군의 감시하에 울분의 날을 보내던 나폴레옹은 6년 후인 182155, 불과 52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자기 야망을 좇던 한 인간의 일생은 그렇듯 허망하게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폴레옹의 비극적인 말로를 초래했던 워털루전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믿던 근위사단에게 진격 명령을 내릴 때, 멀리 보이는 웰링톤 진영의 산등성이만 장악하면 자신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바꾸어 말해 그 능선 너머에 무수한 연합군이 포진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만약 그때 지금처럼 비행기가 있어 나폴레옹이 하늘에서 산등성이 너머에 포진하고 있는 연합군을 보았더라면 패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가장 중요한 전투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눈에 보이는 것만을 모두라 판단한 결과 처참하게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서 누가 훌륭한 지휘관일까요? 눈에 보이는 거만 모두라 단정하는 지휘관은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1차적인 판단의 근거로 삼되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고 생각하고 대비하는 지휘관만 자기 병사의 목숨을 지키면서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나폴레옹 같은 전장의 지휘관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십자가 군병으로 살아가기 원하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 자체는 매일 빛과 어둠의 전투, 선과 악의 전투, 의와 불의의 전투, 참과 거짓의 전투가 벌어지는 거대한 전장입니다. 특히 우리 자신이, 말씀을 따르기를 원하는 우리 속사람과 욕망을 좇으려는 우리 겉사람 간의 치열한 전투장입니다. 그 전투에 패해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도 없고, 또한 이기기 위해서는,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모두라 단정하는 어리석음에서 재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육체의 눈이 볼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된 것입니다. 우주처럼 큰 것도, 세균처럼 작은 것도 보지 못합니다. 태양처럼 밝은 것도, 칠흑 같은 어둠도 볼 수 없습니다. 너무 먼 것도 눈앞에 너무 가까운 것도 보지 못합니다. 벽 너머를 볼 수도 없고, 자신의 등 뒤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자기 몸속조차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볼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을 모두라 생각한다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때에만 주님 안에서 이 세상과의 전투에서, 자신과의 전투에서 언제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다 같은 사람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빌립 집사처럼 유대인이 짐승처럼 간주하는 사마리아 사람을 찾아가 복음을 증거한 헬라파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단지 자신들과 생각과 신념과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울을 집요하게 죽이려 한 헬라파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호칭만 해외파인 헬라파 유대인이었을 뿐, 국내파인 히브리파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극히 옹졸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옹졸한 인간이 신념으로 무장하면 아무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사울을 죽이려 했던지, 예루살렘의 믿음의 형제들은 사울을 가이사랴까지 데리고 가서 그의 고향 다소로 보내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의 집요한 삶의 위협으로부터 사울의 생명을 보장해 줄수 있는 곳은, 그의 고향인 다소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제 고향으로 낙향한 사울은 무려 13년 동안 고향에서 칩거해야만 했다면, 그것은 인생의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울 개인만의 문제이거나 위기일 수는 없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집요하게 죽이려 했던 것은, 사울을 유대교를 배교한 더러운 배신자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만 유대교를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를 이루고 있던 교인들은 히브리파든 혹은 헬라파든, 모두 유대인들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유대교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 역시 유대교를 배교한 배교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울을 집요하게 죽이려한 헬라파 유대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마저 해치려할 수도 있었습니다. 더욱이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최초로 선출된 일곱 집사 전원이 헬라파 유대인들로 교회 전면에 포진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헬라파 유대인인 사울을 집요하게 죽이려 했던 예루살렘의 헬라파 유대인들이, 교회 전면에 나서 있는 헬라파 유대인 집사들마저 제거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주님께서 주님의 새로운 그릇으로 택하신 사울이 고향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다는 당시의 정황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분명 큰 위기일 수 있었습니다.

 

본문 31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접속사 그리하여이후의 내용은 일반적인 예상과는 정반대로 전개되었습니다.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예루살렘을 넘어서게 된 복음은 사방으로 전파 되었고, 그 결과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세워진 교회는 날로 평안을 누리고 견고해지면서 그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이처럼 사울이 헬라파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을 피해 고향 다소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전의 내용은 전혀 일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상반되어 보이는 두 문장을 한데 이어 주는 본문 속의 접속사 그리하여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눈앞에 보이는 것만 모두라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뛰어넘어 , 주님께서 섭리하시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울이 가는 곳마다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만을 보았다면, 그는 자포자기 하거나 절망 속에서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끝내 그 싸움에서 믿음의 용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뛰어넘어 주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큰 섭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비록 유대인의 살해 위협을 피해 다소에 칩거하고 있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조금도 위축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오묘하신 주님의 방법으로 예루살렘에 국한되어 있던 교회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까지 퍼져 가게 하시고, 날이 갈수록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우시사 역동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그 큰 섭리를 사울이 믿음의 눈으로 확인한 이상, 사울에게 다소의 칩거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다소의 칩거가 당장은 고통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 큰 섭리 속에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소의 칩거가 끝난 뒤에도 사울은 수없이 고난을 당했지만, 사울은 어떤 경우에도 고난 자체만을 보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고난을 뛰어넘어, 나중에 찾아 올 보이지 않는 영광을 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주님의 큰 섭리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울에게는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한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설사 문제처럼 보이는 것들이 난마처럼 얽혀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큰 섭리 속에서는 그 모든 것이 주님에 의해 반드시 선으로 귀결됨을 사울은 믿음의 눈으로 보고, 또 자신의 삶으로 매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울은 눈에 보이는 것을 뛰어넘어 보이지 않는 주님의 큰 섭리를 믿음의 눈으로 물리치는 믿음의 용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노아가 방주 속에 있었던 기간은 40일이 아니었습니다. 노아는 방주 속에서 무려 1년하고도 17일이나 지내야만 했습니다. 노아가 지극히 제한된 공간인 방주 속에서 117일 동안이나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 역시, 방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천장의 창문을 통해 위에 계신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위를 보는 사람입니다. 위를 향해 주님께자신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골로새서 31-2을 통해 우리에게 위를 지향하는 삶을 살 것을 명하십니다.

위를 향해 주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위에 계신 주님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 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비행기에서는 내려다보이듯이, 주님의 시선으로 내려다볼 때에만 육체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비로소 보이게 됩니다. 당장은 유리해 보이지만 그 결과가 해와 독으로 끝나는 것이 무엇인지, 당장은 환난처럼 보이나 영광으로 귀결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길고 무엇이 짧은지 무엇이 영원하고 무엇이 찰라적인지, 무엇을 취해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가 확연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각 사람의 삶을 되돌아보십시다. 우리가 세상과의 싸움에서, 또 자신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모두라고 단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계획이 무산될 때, 우리가 원치 않는 상황이 우리 앞에 전개 될 때, 그리하여 절망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우리의 욕망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 겉 사람이 세상의 유혹을 좇으려 할 때, 그리하여 우리의 속사람의 외침에 귀 막고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눈에 보이는 산등성이 너머를 보지 못한 나폴레옹처럼,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전혀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아쉬움과 후회만을 되풀이 할 때, 우리의 이 모든 허물과 어리석음을 회개 하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십시다. 그러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앞길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다면, 우리의 인생이 끝도 없는 광야를 헤매고 있다면, 우리가 지금 십자가의 죽음 같은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위를 향해,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내려다보십시다. 그래서 우리의 눈이 보이는 것을 뛰어넘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큰 섭리를 바라보십시다. 그때 우리는 매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것이요, 이 세상의 어둠을 이기는 믿음의 용장이 될 것입니다.

 

祈禱)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 같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모두라 단정하고,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느라 세상과의 싸움에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백전백패하였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전혀 그리스도인처럼 살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위를 향해, 오직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게 하옵소서. 세상에서 우리 육체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옵소서.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을 바르게 분별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 세상과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믿음의 용장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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