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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그리스도 안에서

  • 설교자료실
  • 관리자
  • Aug 29, 2018
  • 조회 1428

그리스도 안에서

  안석수 목사 

* 본문/ 11:22-24

 

이방 세계에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안디옥 교회의 소문은 마침내 48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예루살렘 모 교회에까지 전해졌습니다. ,할레 받지 않은 이방인을 위한 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에 대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이의를 제기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 일행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까지 베푼 베드로를 통해, 주님의 구원이 이방인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지체 없이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로 파송하였습니다.

안디옥에 이른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안디옥의 이방인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우리말 권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의 파라칼레오는 미래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미래완료형은 반복과 계속의 동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권면을 반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요? 주님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는 마음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려는 자기 자신을 절대로 넘어 설 수 없습니다. 오직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는 사람만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래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많은 인간들 가운데, 2천 년 전 이 땅에 오셨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3년 동안 밤낮으로 함께 지낸 사람은 단 열 두 명의 제자들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든 인간 중에서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표적과 기사를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온갖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며,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토막으로 대군중을 먹이시며, 바다 위를 걸어오시고, 말씀 한 마디로 폭풍을 잠재우시는 것을 소문이나 글로 접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생생하게 목격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로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3년 동안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의 몸은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께 굳건히 붙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지 않을 때 그들은 주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야망을 이루려는 한심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참된 제자로 산 것은, 그들이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을 때, 주님께서 그들이 주님의 제자답게 살 수 있도록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만은 예외였습니다. 몸은 주님 곁에 주님과 함께 있었지만 그 마음은 세상의 재물에 붙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먹은 배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 가운데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특별히 선택받은 열두 명 중의 한 명이 되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지 않을 때 가롯 유다는 자기 욕망에 눈 먼 어리석은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으라는 본문의 말씀을 사도 바울의 용어로 표현하면 주님 안에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주 안에” “예수 안에”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안에” “성령 안에라는 말을 무려 164회나 반복하였습니다. 바울은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 안에 있지 않으면, 한순간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7:19-24 말씀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사도 바울이 죄와 악의 노예로 살려는 자신과,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려는 자신 사이에 언제나 싸움이 있음을 토로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을 때만, 자신이 주님 안에 있을 때에만, 주님의 생명과 능력에 힘입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바울의 탄식은 곧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졌습니다. 8:1-2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으로 죄와 사망의 올무에서 벗어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마저도 주님 안에 있음으로,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음으로 죄와 악을 좇으려는 자신을 이기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주님 안에서를 무려 164회나 강조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어느 한 여 집사님의 고백입니다. 여 집사님이 최근에 집 근처 세일 매장에서 49천 원짜리 바지와 1만 원짜리 바지를 골라 계산대에 내려놓았습니다. 젊은 여직원이 49천 원짜리 바지의 가격표를 읽지 못해 동료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동료 직원이 만 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집사님이 그건 49천 원짜리인데요하고 말하려다가 그만 그 말을 꿀꺽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진실을 밝히려는 것보다 차액 39천 원에 대한 유혹이 더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지를 여직원이 쇼핑백에 넣는 동안 그래도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지금 뭘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도 접어버렸습니다. 계산이 끝난 뒤에도 매장을 떠나지 않고 다른 물건을 구경하는 척 하면서 계속 매장에서 서성거렸습니다. 혹 직원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차액을 요구하면 되돌려 주지만, 끝내 모른다면 차액 39천 원을 자기 나름대로 합법적으로 착복하기 위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집사님은 마침내 결심한 듯 매장을 나왔습니다.

그러나 매장을 나서는 순간 집사님의 마음은 39천 원을 벌었다는 기쁨은커녕 도리어 누군가가 뒷덜미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마냥 무겁고 불편하기만 했습니다. 그 날밤은 금요일인지라 성경공부에 참석했는데 마침 그날 성경공부의 주제는 빌레몬서였습니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 도망친 오네시모에게 주인을 찾아가 회개할 것을 권하고 또 주인 빌레몬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결국 그 집사님은 빌레몬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날 있었던 일을,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그리스도인인지를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세일 매장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어제 실수한 젊은 여직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 매장에 나와 있던 사장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39천 원을 되돌려 드렸습니다. 사장님은 오히려 집사님에게 감사하면서 감사의 선물을 주려고 했습니다. 집사님은 사장님의 호의를 극구 사양하고 매장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제 부당한 차액 39천 원을 착복하고 매장을 나설 때에는 누군가 뒷덜미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마음이 무겁고 불편하기만 했는데, 그 돈을 되돌려 주고 나올 때,; 마음은 날아오를 것처럼 기쁘고 가볍기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생명과 능력을 힘입지 않고서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죄와 악의 노예 된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십시다. 우리는 가롯 유다처럼 몸은 주일마다 예배당에 앉아있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늘 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는 안디옥 교인들과 주님 안에 거하던 사도 바울처럼 자신과의 싸움에서 항상 이기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가롯 유다처럼 몸은 주님 곁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세상의 재물에 집착하느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백전백패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그릇된 삶을 당장 회개해야만 합니다. 자기 욕망을 좇느라 자기와의 싸움에서 완패한 가롯 유다는 결국 목매어 자살 하는 것으로 그 생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욕망을 좇아 살려는 우리 자신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자신 사이에는 치열한 싸움이 계속될 것입니다. 가롯 유다라고 뿔 달린 도깨비도 아니고, 사도 바울이라고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신적 존재인 것도 아닙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하면 가롯 유다가 되는 것이고, 이기면 사도 바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이제부터 오직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주님 안에 거하십시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생명과 능력을 힘입어 우리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해치는 미련한 가롯 유다가 아니라 인생을 슬기롭게 사는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습니다.

 

祈禱)

하나님 아버지, 어리석은 가롯 유다가 실은 우리 자신의 모습임을 이 시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매순간 자신과의 싸움에서 백전백패했습니다. 우리 모두 안디옥 교회 교인들처럼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을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삶을 사는 우리를 가리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해 주옵소서. 사도 바울처럼 언제 어디서나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 안에 거하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주님 안에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늘 승리하면서 더 이상 자신의 생명을 자해하는 어리석은 가롯 유다가 아니라. 매 순간 영원을 바라보는 이 시대의 바울이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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