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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믿음이냐?

  • 설교자료실
  • 관리자
  • Aug 14, 2019
  • 조회 1169

어떤 믿음이냐?

안석수 목사

*본문/ 11:21-27

 

어떤 마을에 술집이 한 곳 생겼습니다. 조용하던 마을에 술꾼들이 모이고 밤늦도록 어찌나 떠들어대는지, 인근 교회에서는 특히 주일저녁예배에 큰 지장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성도들은 하나님께 그 술집을 불태워버리시든지 어떻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비가 억수같이 퍼붓더니 그 술집에 벼락이 떨어져 순식간에 타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술집 주인은 동네 교회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건물이 불타버렸다고 재판을 걸어 손해배상을 요구하였습니다. 반면에 교회는 그럴 리가 없다고 변호사를 고용하여 맞섰습니다.

결론적으로 술집 주인은 기도의 능력을 확신했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입니까?

 

4복음서에 보면 사탄은 메시아, 즉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첫 번째 유혹이 무엇이었습니까? 네가 정말 메시야라면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해보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 유혹은 네가 정말 구원자라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초능력을 보이라는 것, 그리고 세 번째 유혹은 네가 정말 그리스도라면 자기에게 굴복하여 온 세상의 권력을 장악하라는 것이 유혹의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을 잘 살펴보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을 대변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에 오실 메시야는 돌을 명하여 떡덩이로 변하게 하는 방법을 써서라도 궁핍한 그들의 경제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또한 이 땅에 오신 구원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초능력의 소유자여서 백성들이 원할 때마다 그 초능력을 사용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오실 구원자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들의 지배자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권력을 장악하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던 믿음의 내용으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 대다수가 원하고 요구하는 메시야가 되라는 유혹이었음을 우리는 이 시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는 바대로의 메시야가 되라는 사탄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셨음을 성경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믿음대로 충족시켜 준다면 일시적으로 인기 있는 정치인이나 거대한 부를 누리는 사업가 혹은 존경받는 유명인이 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인간의 죄와 죽음 그리고 생명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해 주는 참된 메시아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메시야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전혀 잘못되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고수하였고,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가 가지고 있던 그 잘못된 믿음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부정하고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노라할 때, 믿음에 대한 인식이나 내용의 진실과 거짓 여부는 어떤 경우에도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지 않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예수님께서 그 곳을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급히 나가 예수님을 영접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문 21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사랑하는 오라비를 잃은 누이로서 지극히 당연한 하소연이었습니다. 이어서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22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줄 아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시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23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나사로는 이미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마르다의 반응이 24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또 안다고 합니다. 비록 오라비가 죽었지만, 이 세상 끝 날에 다시 살아날 줄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 25-26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는 사람이 죽으면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종말에 다시 산다고 믿는 반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육체가 땅 속에 장사 지낸 바 되더라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육체와 상관없이 아예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의 고백입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내가 믿나이다.“라고 분명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 이후 예수님께서 곧장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찾으신 까닭은, 죽은 나사로 육체를 다시 일으키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유한한 인간들에게 인간의 수준으로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의 육체를 일으키시기 위해 무덤 문을 열라시는데, 마르다는 이미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어 시체가 심하게 썩었으므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시든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것임을 확실히 안다고 자신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다 아노라고 공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육체를 일으키시려는 지금, 마르다는 불가능하다며 예수님을 막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르다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다 아노라 호언장담했던 그 앎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믿는다고 그토록 힘주어 강조했던 마르다의 믿음은 또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는다할 때, 믿음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나 내용의 옳고 그름은 우리가 가진 믿음의 강도에 의해 판가름되는 것이 절대로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이라 부릅니다. , 양은 고집불통입니다. 양이 한 번 고집을 피우면 장정 두 명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도 꿈쩍도 않습니다. 둘 째, 양은 지극히 근시입니다. 조금만 멀리 있는 것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셋 째, 양들은 추운 겨울에는 서로 떨어져 자고 더운 여름에는 꼭붙어서 잡니다. 겨울에 붙어서 자면 상대가 따뜻해할 것이 싫어서 떨어져 자고, 여름에는 떨어져 자면 상대가 시원해할 꼴이 보기 싫어 붙어서 잡니다. 말하자면 양은 극도로 이기적인 동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양이란 부르신 것은, 인간의 실상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고집불통인지, 자신이 한 번 옳다고 여기면 그것이 거짓된 것일지라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또 인간이 얼마나 근시안인지 목전의 이득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그 이외의 것은 아예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그가 나보다 더 잘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합니다. 나보다 앞서는 사람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끌어내려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망해도 나만 망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기뻐합니다. 다른 아이는 다 떨어져도 내 자식만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면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 확신하는 때야말로, 본문 속의 마르다처럼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든, 무엇을 믿든, 그것은 항상 말씀 안에서 고정되어 가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 그 마음만이 참된 앎과 바른 믿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영국에 존 윌튼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것 하나 오랫동안 집착하는 법이 없었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방랑 생활을 하다시피 살았는데 후에 자신을 돌이켜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술 담배를 끓고 일주일에 일실링씩의 보수를 받고 점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교회에 나가 설교를 듣던 중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 질 것이요.“(17:20)라는 말씀을 듣고 큰 깨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내가 아주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불가능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항상 윗주머니에 겨자씨를 넣고 다녔습니다. 그 후에 실업가로 크게 성공하여 여왕 엘리자베스2세로부터 작위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내가 좌절할 때마다 이 겨자씨를 내어 보며, 하나님께서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못하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나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는가?‘ 이렇게 나를 돌아보며 용기를 얻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지금 무엇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지금 이 시간 그 앎과 그 믿음을 겸손한 마음으로 내려놓읍시다. 그 앎과 그 믿음을 벗어나지 않으면, 그것을 뛰어넘지 아니하면, 지금의 믿음과 앎으로부터 자유하지 아니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온전히 만날 수 없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앎과 믿음이 성숙해 질 수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다. 성경에 말씀하는 구원은 언제나 자유요, 자유가 있는 곳에만 구원이 있고, 구원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자유가 있으며, 이때의 자유라 무엇보다도, 깨어 있는 말씀을 향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이라 부르셨습니다. 정말 저희들은 고집불통이요, 눈 앞밖에 보지 못하는 근시안이요, 나 이외에는 알지 못하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하나님을 다 안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호언장담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고집불통, 이 근시안, 이 이기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얼마나 알고, 주님을 믿으면 얼마나 바로 믿겠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확신하고 예수님을 바로 믿는다고 호언장담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실은 주님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이 시간 진정 깨닫는 우리들이기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祈禱)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이처럼 불러 주셨사오니,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지금 우리가 어떤 앎,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 믿음, 그 앎으로부터 진정 자유 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날마다 주님을 온전히 알아가는 희열을 맛보게 도와주시고, 우리의 믿음과 앎이 날로 성숙해 가는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이 후에는 우리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피곤한 삶을 더 이상 살지 않게 하시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함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참 삶의 활력 속에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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