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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람다운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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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y 06, 2018
  • 조회 4264

사람다운 사람으로

  안석수 목사 

*본문/ 10:10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외양간입니다. 짐승들이 먹이를 먹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소변을 마구 보는 곳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지저분한 곳이 외양간일 것입니다. 실제로 웬만한 비위가 좋은 사람이 아니고는, 외양간에 머물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낮고 천한 곳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것은 실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생>이란 책의 저자 지오반니 빠삐니는 이에 대해 누구보다 예리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것 자체가 바로 인간들이 대 소변을 보며, 그 오물 웅덩이 속에서 인간들이 뒹구는 커다란 외양간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신성한 것을, 인간들은 날마다 배설물로 만들어 더럽히고 있지 않는가? 인간들은 그 오물더미를 뒤집어쓰고 앉아서 어리석게도 인생은 살만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인간들 가운데서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았고,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이들을 찾았다. 그러나 아이들보다도 더 단순하고 유순한, 짐 싣는 동물들이 제일 먼저 그리스도를 환영하였다.

예수님께서 외양간에 태어나신 것은 그 곳이 가장 더럽고 지저분한 곳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선택하실 수 있는 곳 중에 가장 깨끗한 곳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야말로 짐승들의 외양간보다 훨씬 더 더럽고 지저분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오반니 빠삐니의 눈에 비친 인간이란, 짐승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는, 아니 짐승보다 훨씬 못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인간답지 않는 인간을 가리켜 짐승 같은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인간다운 인간입니까? 혹은 짐승 같은 인간입니까? 아니면 짐승보다 못한 인간입니까?

 

창세기 526부터 라멕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하여 재산을 늘려나갔습니다. 라멕에게 사람들의 그런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아들을 낳자 아들 이름을, 위로라는 의미로 노아라 지었습니다. 열심히 땀을 흘리며 수고롭게 일하는 인간을 위로해 주라는 의미였습니다. 말하자면 라멕에게 수고를 다해 열심히 일하는 인간들이 위로를 받을 만큼 가치 있는 존재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67을 보면 똑같은 사람들을 놓고 하나님께서는 모두 쓸어 버려야 할 더러운 죄인, 짐승보다 더 못한 인간들로 판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땀을 흘린다는 것만으로는, 수고롭게 일한다는 것만으로는 사람다운 사람, 짐승보다 나은 인간으로 평가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짐승 역시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수고합니다. 그러나 짐승은 인간처럼 불의를 행하지 않습니다. 인간처럼 욕망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은 손도 대지 못하도록, 단지 태산처럼 쌓아 두기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짐승도 이해관계가 상반 될 때 서로 처절하게 싸우지만, 인간처럼 상대편을 무차별적으로 대량 학살할 수 있는 무기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처럼 오직 자기 새끼만을 위해 부도덕한 비리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짐승은 오직 본능에 따라 살아가지만, 어떤 경우에도 지성을 자랑하는 인간처럼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 반대로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땀을 흘려 수고하여 얻은 것이 많아질수록, 하나님과 더욱 무관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수고로이 애쓰며 열심히 땀 흘려 일했다는 것만으로는 결코 인간다운 인간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진정 인간다운 인간이기 위해서는, 행하는 일의 내용과 목적 그리고 방법이 짐승과는 확연하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이 구분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사람으로서의 가치는 상실되고 맙니다.

여러분은 지난 사순절 주간만이라도 하신 일의 내용과 목적 그리고 방법이 짐승과는 확연히 구분되었습니까? 오히려 더 못하지는 않았습니까?

 

짐승과 인간의 진정한 차이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창세기 27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창세기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짐승은 모두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짐승과는 달리 인간에게는 한 가지가 더 주어졌는데, 바로 하나님의 생기였습니다. 하나님의 생기로 인해 흙으로 지은 인간은 생령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짐승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영적인 면을 상실한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은 짐승보다 더 못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영적인 면을 상실한 인간이 그 어떤 짐승보다 더 탐욕적이고, 그 어떤 동물보다 더 냉혹하고, 그 어떤 맹수보다 더더욱 잔인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짐승의 근본적인 차이인 이 영적인 면은 무엇으로 드러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영성을 갖지 못한 짐승들은 비록 하나님의 질서 속에 있을지라도,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지 못합니다.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것으로 인증되는 것입니다. 짐승은 무엇을 행하든 자신의 본능에만 의존할 뿐, 자기 행위와 하나님을 연관 지어 생각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또 타인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요, 참된 사랑은 봉사와 헌신 속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짐승의 본질적인 차이이고, 인간다운 인간이란 짐승과 달리, 자기중심적인 삶을 벗어나서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오래 전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죽음의 현장 나치 수용소에서 1,200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구출해 낸 쉰들러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 속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등장합니다.

먼저 자신들의 이념과 목적하는 바를 위해 무고한 유대인 수 백 만 명을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마구 학살한 독일 나치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입니다. 다음으로는 오직 자기 본능대로 살았던 쉰들러입니다. 그는 본래 술과 여자와 돈의 노예 였을뿐 아니라 협잡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짐승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변화된 쉰들러입니다. 변화된 쉰들러는 모든 위험을 무릎 쓰고, 나치 수용소로부터 1,200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해 내었습니다.

쉰들러의 이야기를 들은 작가 토머스 케닐 리가 생전의 쉰들러를 찾아가, 당신은 나치 당원이었는데 왜 당명을 어기면서까지 유대인들을 구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본 관객들이 감동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영화 곳에 나타난 세 사람의 모습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실상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

그 동안 우리 삶의 터전을 외양간보다 더 못한 곳으로 더럽히며 살아온 우리가 어떻게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히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생명은 짐승보다 못한 삶으로부터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힘입니다. 이 생명은 우리를 인간다운 인간으로 가꾸어 주는 원동력입니다. 이 생명이야말로 죽음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영원한 생명, 참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부활은 새벽이 되기도 전에 이미 성취된 사실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난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부활은 행사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맞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내적으로는 비상한 혁명적인 삶으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동안의 거짓된 삶을 버리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 위해, 이 시간 이 곳에서 우리를 품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들어가며 나오며 하나님의 꼴을 먹으십시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먼저 주님의 생명을 힘입어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처소가 비록 외양간보다 못하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무릎 꿇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한 성소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임마누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祈禱)

하나님 아버지,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시간, 주님의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주님의 생명을 힘입어,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싶은 모든 유혹에서 벗어나,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위대한 힘과 혁명적인 능력은 평상의 우리 삶 속에 있음을 잊지 말게 해 주시고, 아름다운 가정과 일터를 외양간보다 더 추한 곳으로 허무는 사람이 아니라, 외양간보다 못한 이 세상을 거룩한 성소로 회복시키는 주님의 도구로 살아가게 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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