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설교)하나님의 휘페레테스

  • 설교자료실
  • 관리자
  • Feb 07, 2019
  • 조회 1035

하나님의 휘페레테스

안석수 목사

*본문/ 13:13-14

 

바울은 구브로 섬의 바보를 기점으로 성경 속에서 더 이상 교만의 상징인 사울이 아니라, 겸손의 대명사인 바울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바울은 전도팀의 새로운 리더로 부상하였습니다.

버가에 당도한 이후, 바울과 바나바를 수행원이었던 마가가 웬일인지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가가 공적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처음 출발지였던 안디옥 교회로 귀환한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 집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가는 예루살렘의 부자 마리아의 아들이자 전도 팀의 첫 번째 리더였던 바나바의 사촌 동생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바울과 베드로의 충실한 동역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복음서 마가복음을 기록했던 기자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잘 것 없는 인간을 세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고백할 때, 그것은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찬양하기 위함이지, 인간의 보잘것없고 어리석은 자기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함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책임하고 어리석었던 마가가 마침내 마가복음의 기록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보잘것없는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올바르게 응답하는 하나님의 통로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통로의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인간의 일생은 언젠가는 반드시 끝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되, 적어도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자기 인생을 헛되이 날려 버리는 어리석은 삶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마가가 왜 버가에서 자기 책임을 내팽개치고 무단이탈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버가에 도착한 바울 일행의 다음 목적지는 고원지대에 위치한 비시디아 안디옥이었습니다. 버가에서 오늘날 차도로 20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을 그 차도를 따라 직접 찾아가 보면 마가가 그 길을 마다하고 집으로 되돌아 가버린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버가에서 술탄 산맥의 남쪽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야 합니다. 험산준령으로 이루어져 있는 타우루스 산맥은 예로부터 강도와 산적들의 소굴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산맥을 넘는 것은 자신의 생명과 자신이 지닌 재산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강도나 산적은 차치하더라도 해발 4천 미터에 달하는 고봉들로 이루어져 있는 타우루스 산맥은 그 길이 얼마나 험한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자동차로 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3시간 30분이 걸리고 뿐만 아니라 자동차 뒤쪽에 앉은 사람은 심한 멀미에 시달린다고 하니 도보로 그 산맥을 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궂은일을 모르고 자란 마가가, 그 험한 타우루스 산맥을 보고 그만 기가 질려 무단이탈해 버렸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무단이탈 이유가 무엇이었든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마가가 포기한 그 험한 길을 바울과 바나바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갔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35은 마가를 가리켜 바울과 바나바의 수행원이라 부릅니다. 우리말 수행원으로 번역된 휘페레테스는 본래 배 밑창에서 노 젓는 노예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로마 전함 밑창 좌우에는 노 젓는 노예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밖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밖을 내다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배가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결정사항이 아니라 함장의 소관이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단지 고수가 치는 북의 속도에 맞춰 힘을 다해 노를 젓는 것뿐이었습니다. 마가는 그와 같은 휘페레테스였습니다. 다음 행선지가 어디인지 그것은 마가의 소관이 아니었습니다. 마가의 임무는 바울이 행선지를 정하는 대로 최선을 다해 그를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는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타우루스 산맥의 위용에 압도되어 자신이 휘페레테스임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하심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든 하나님의 신실한 휘페레테스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본문의 마가가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일행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통로가 되기 위해 안디옥을 떠난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한 기도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결정적인 순간에 휘페레테스인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였고, 그 결과는 한동안에 걸친 자기 인생의 허비와 동시에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로 나타났습니다.

그렇지만 청년 마가가 외면한 그 타우루스 산맥을 바울과 바나바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넘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과 바나바는 타우루스 산맥의 위용 앞에서도 자신들이 주님의 휘페레테스임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메섹 길 위에서 바울을 부르실 때, 바울은 의인이거나 성자가 아니었고, 교회를 짓밟고 주님을 대적하던 폭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 것은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삼으기시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말 으로 번역된 헬라어가 바로 휘페레테스입니다.

 

그리고 고전4:1-2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으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말은 사람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주님의 일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일꾼이란 단어가 헬라어 언문에는 휘페레테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주님의 휘페레테스로 인정할 정도로 자신의 휘페레테스 됨에 충실하였으므로 하나님의 휘페레테스인 그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충성뿐이었습니다.

로마 전함의 휘페레테스들이 함장이 지시하는 곳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오직 노 젓기에 충성을 다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타우루스 산맥이 아무리 높고 험하다 한들, 그것이 바울의 일행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인도하시는 한, 설령 그 앞에 많은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바울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 수많은 고난을 뚫고 나가는 충성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마가처럼,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을 맞았을 때, 그 상황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휘페레테스 됨을 망각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로 인해 인류의 역사가 새로워지는 일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바울 한 사람이 신약성경 1/4이 넘게 기록하는 영광은 더욱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귀중한 교훈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고 계심을 믿는 사람에게만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신실한 휘페레테스로 살 수 있고, 자신이 하나님의 휘페레테스임을 잊지 않는 사람만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품격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상황 속에서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품격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휘페레테스임을 잊지 말아야 하고, 그것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깨어 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깨어있음은 지금 이 시간 우리들과 함꼐 하시는 하나님을 매 순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성숙한 믿음도 신실한 휘페레테스의 삶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인의 품격도, 모두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깨어 있음으로부터 시작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깨어 있는 통찰력을 지니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따르는 참된 휘페레테스의 삶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과 기도를 통한 경건 훈련의 목적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깨어 있는 통찰력을 지니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 깨어 있는 것보다 더 세상을 새롭게 하는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 속에 두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祈禱)

하나님 아버지, 믿음은 어떤 상황 속에서든 하나님에 대해 깨어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됨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언제 어느 곳에 있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곳이 없음을 잊지 않게 도와주시고, 우리가 어떤 상황을 맞든 비록 그 상황이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상황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늘 기억하게 하옵소서. 말씀과 기도 속에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깨어 있는 통찰력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 날마다 새롭게 빚어져 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인생의 그 어떤 타우루스 산맥 앞에서도 바울처럼 조금도 굽히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품격 있는 휘페레테스로 일평생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제목 날짜
(설교)기다리라 2018.08.29
(설교)나는 누구인가? 2018.08.29
(설교)하나님의 손에 2018.08.29
(설교)그리스도 안에서 2018.08.29
(설교)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 2018.12.20
(설교)여호와를 기뻐하라 2018.12.20
(설교)주님의 도구 -막달라 마리아 2018.12.20
(설교)인생의 산맥을 넘으며 2018.12.20
(설교)십자가 가치관으로 2018.12.20
(설교)거룩한일 2019.01.27
(설교)갈릴리 사람들아 2019.01.28
(설교)실루기아에서 2019.02.02
(설교)믿음의 반전 2019.02.07
(설교)하나님의 휘페레테스 2019.02.07
(설교)무얼 위해 살까? 2019.03.07
(설교)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2019.03.07
(설교)영원을 바라보며 2019.03.07
(설교)평범 속의 비범의 삶 2019.04.03
(설교)하나님 중심의 삶 2019.04.03
(설교)이례적 능력 2019.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