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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실루기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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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eb 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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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루기아에서

안석수 목사

*본문/ 13:4-5

 

성령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그들의 수행원이었던 마가를 통로로 삼아, 하나님의 복음을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 속으로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 17년이 경과한 후의 일이었습니다.

본래 사울이라 불렸던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고, 예루살렘에서 200킬로미터 이상이나 떨어진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연행하기위해 나설 정도로,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것을 천직으로 삼은 폭도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길 위에서 바울을 사로잡아 주신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9:15)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에게 세상 모든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흘러가게 하기 위해 택한 하나님의 그릇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즉각 그 목적으로 사용하심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당사자 바울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사로잡히는 즉시, 자신을 살려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증인이 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먼저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경건의 훈련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고향 다소에서 마치 실패자처럼, 13년동안 칩거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후 안디옥 교회에서 1년간 목회경험을 쌓게 한 후에야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사용하셨습니다. 바울의 경우만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베들레헴이 살고 있던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실 때 다윗은 청소년이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청소년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셨음에도, 그날로 다윗을 왕좌에 앉히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죽이고 나라를 구해 내는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고 그를 왕좌에 앉게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사울 왕의 질투를 받게 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 약 10년 동안이나 도망 다녀야만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대신하여 왕좌에 올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신 지 거의 10년 이상이 지난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선택하셨다고, 반드시 당장 그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관학교 입학이 곧 장교가 되었음을 의미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가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면, 그는 장교가 되기 위한 관문을 겨우 통과했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생도는 필요한 훈련을 거쳐야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장교로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선택한 다윗과 바울을 당장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사용하심 사이에는 반드시 쓰임 받기에 합당한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분명한 응답을 받았는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말씀을 확실하게 받았는데도,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뜻한 바와는 전혀 다른 상황 속에 처해있을지라도, 바로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을 믿음의 용장으로 훈련시키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다윗과 바울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각각 10년과 17년 만에 그들을 하나님의 도구로 본격적으로 사용하셨듯이,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우리 역시 반드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본문 4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에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으로 전파하기 위한 하나님의 본격적인 통로로 쓰임을 받게 된 바울은 바나바, 그리고 요한과 함께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먼저 실루기아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첫 번째 목적지인 구브로로 향하는 배를 타기 위함이었습니다. 실루기아는 안디옥에서 서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지중해의 항구 도시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찾아간 실루기아의 헬라어 명칭을 셀류케이아입니다. 주전399년경 셀레우코스 1세에 의해 건설된 셀류케이아는, 당시 시리아 지역 최대의 항구였습니다. 셀레우코스 1세는 자신이 건설한 항구에 셀류케이아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름인 셀류우코스의 형용사 형태로 셀레우코스의 것이란 의미입니다. 셀류케이아는 황제의 이름을 붙일 만큼 대규모의 항구였습니다.

바로 그 항구에서 바울 일행은 구브로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셀류케이아 항구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비한다면, 세상의 부귀 영화와 거리가 멀었던 그들의 행색은 유난히 초라했을 것입니다.

그토록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행색의 그 일행이 웅장한 셀류케이아 항수에 나타났다고 누구 한 사람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 항구에서 구브로행 배에 승선했다한들, 무슨 대단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거나 기대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마가가 함께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바로 그곳 왕의 항구에서 황제의 항구로 격상된 셀류케이아에서 배를 탔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바울이 셀류케이아에서 가장 볼 품 없는 행색과 몰골이었을망정, 그가 그곳에서 배에 오르는 순간이야말로 복음으로 세계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셀류케이아 항을 떠나 구브로를 향하여 지중해의 물살을 가르며 나아갑니다. 바울은 그날 셀류케이아 항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하나님의 통로로 쓰임 받기 위해 세상을 향해 자기 인생의 배를 출항시킨 것이었습니다.

 

2천년 전 왕의 항구에서 황제의 항구로 격상된 셀류케이아는 번영의 대명사요 난공불락의 요새요, 웅장함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셀류케이아에서 바울은 지중해를 향해 자기 인생의 배를 출항시켰습니다. 셀류케이아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비한다면, 바울은 그 웅장한 셀류케이아 항구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무명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천 년이 지난 오늘 셀레우코스 왕조를 창시한 셀레우코스 1세도 그 땅을 정복한 로마 황제도, 그들에 의해 건설되고 확장되어 화려함과 웅장함의 대명사였던 셀류케이아 항구도,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남은 것이 있다면 오직 폐허요 허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과는 반대로 2천년 전 그때에는 초라해 보이기만 하던 바울, 그는 오늘도 영원 속에 살아있습니다. 세계 역사는 거대한 로마 황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라한 몰골의 바울에 의해 새로워졌고, 또 새로워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새로워 질것입니다. 바울은 영원 속에서 그 어떤왕이나 황제보다 더 큰 거인으로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2천년 전 그날에도 황제의 항구인 셀류케이아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욕망의 바다를 향해 자기 욕망의 배를 출항시켰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 그 항구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의 통로가 되기 위해 자기 인생의 배를 출항시켰습니다. 바울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있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허무와 폐허로 끝날 세상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었습니다. 그 결과 셀류케이아 항구를 건설한 셀레우코스왕도, 그 항구를 황제의 항구로 확장한 로마 황제도, 그 항구에서 욕망의 배를 출항시켰던 숱한 사람들도, 황제의 항구로 불리던 셀류케이아 항구 자체도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바울은 우리 앞에서 영원한 사도로 살아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황제의 항구인 셀류케이아에서 자기 인생의 배를 출항시키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온통 욕망의 법칙, 황제의 논리, 경제원칙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 항구에서 무슨 배를 출항시키고 있을까요? 우리가 서 있는 곳이 황제의 항구인 셀류케이아이기에 황제의 논리를 좇아 욕망의 배를 출항시키고 있습니까? 아니면 셀류케이아를 반면교사로 삼아 진지의 배를 출항시키고 있습니까? 자기 이기심을 위한 배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한 배입니까? 머지않아 폐허로 변해 버릴 세상을 향한 배입니까? 죽음을 깨뜨리고 영원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한 배입니까?

 

한국인이 작사 작곡한 최초의 대중가요는 왕평작사에 진수린이 작곡하고 1928년 이예리수가 부른 <황성옛터>입니다. 그 노래는 진수린 씨가 개성에 있는 고려 황궁터인 만월대를 한밤중에 찾았다가 얻은 착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화려했던 옛 황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폐허로 변해 버린 황궁터에는 무심하게 달빛만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고려황궁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속의 셀류케이아를 비롯하여 그 옛날 지중해 세계를 석권했던 로마 황제의 황궁터도 마찬가지로 남은 것이라고는 폐허뿐입니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허망한 황제의 논리를 좇아 자기 인생의 배를 출항시킨 사람의 인생도 똑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 인생에 셀류케이아의 획이 그어지게 하십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황제의 항구인 셀류케이아에 황제의 논리를 좇아 자기 욕망의 배를 출항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하나님의 통로가 되기 위해 우리 인생의 배를 출항시키십시다. 비록 우리에게 지닌 것도 없고 우리의 행색과 몰골이 볼 품 없이 초라하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 항로에 어떤 폭풍이 몰아닥쳐도, 그것 역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이 세상에 전파하는 하나님의 통로가 되기 위해 우리 인생의 배를 출항시키는 한, 영원한 사랑이요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배의 사공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祈禱)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훈련 방법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오늘 말씀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셀류케이아인 이 세상 속에서 무엇을 위해, 무슨 배를 출항시켜왔는지를 되돌아보게 해 주심도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 셀류케이아의 바울 일행이 되게 해 주옵소서. 오직 하나님을 위해 자시 인생의 배를 출항시킬 줄 아는 바울 일행의 믿음과 지혜와 용기를 우리에게도 내려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비록 볼품없는 존재이며 우리 앞에 폭풍이 몰아친다해도 우리 모두 우리 인생의 사공이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이 세상에 전파하는 이 시대의 바울 일행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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