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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인생의 산맥을 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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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Dec 20, 2018
  • 조회 874

인생의 산맥을 넘으며

안석수 목사

*본문/ 11:24-26

 

오직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무려 13년간이나 고향 다소에서 칩거하던 바울이 또다시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마침내 고향 다소를 벗어나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2천 년 전, 말이나 마차를 갖지 못한 서민들의 주요 교통수단은 도보였습니다. 선박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로 부정기 노선이어서 여행객의 일정에 맞추어 이용하기가 쉽지 않았고, 또 서민들에게는 비용도 만만찮았습니다. 그래서 서민들은 아무리 먼 곳이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육로로 걸어 다녔습니다. 본문의 바울과 바나바 역시 다소에서 안디옥까지 약 175킬로미터의 거리를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소에서 안디옥이나 예루살렘을 육로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마누스 산맥을 넘어야만 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아마누스 산맥이 얼마나 높고 험한지 아마누스 산맥 중턱 위로는 안개가 뒤덮여 있습니다. 그 험한 아마누스 산맥을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걸어서 안디옥을 향해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아마누스 산맥을 넘은 것은 본문이 처음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이전에도 아마누스 산맥을 두 번이나 넘은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은 본문 시점에서 약 20년 전, 바울이 난생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유학길에 오를 때였습니다. 다소에서 안디옥남쪽 480여 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아마누스 산맥을 넘어야만 했습니다.

20세 전후의 청년 바울은 단순히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위해 아마누스 산맥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유대교의 큰 지도자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아마누스 산맥을 넘었습니다. 자기 야망을 이루기 위해 아마누스 산맥을 넘는 바울의 포부를 우리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3년 전 바울은 아마누스 산맥을 되넘어 고향 다소로 되돌아가야 만 했습니다. 유대교의 큰 지도자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이루었기에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금의환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젊었고, 패기만만했고, 세상의 지식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오직 고향 다소에 칩거하게 하시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아마누스 산맥을 되넘어와야만 했습니다. 그가 그때까지 이룬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아마누스 산맥을 넘었던 바울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이 빈손으로 낙향하기 위해 아마누스 산맥을 되넘는 바울은 영락없는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본문에서 세 번째로 아마누스 산맥을 또다시 넘었습니다. 옛날처럼 자신의 야망이나 꿈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를 공동 목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오랜 세월에 걸쳐 똑같은 아마누스 산맥을 세 번씩이나 넘었습니다. 아마누스 산맥 그 자체는 변함이 없었지만, 바울이 아마누스 산맥을 넘을 때마다 그 의미는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 역시 매일 인생이란 산맥을 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아마누스 산맥을 넘는 바울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마누스 산맥을 넘는 바울을 통해 3가지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인생 산맥을 넘는 것은 스스로를 죽이는 백해무익한 자해 행위라는 것입니다. 청년 바울이 처음으로 아마누스 산맥을 넘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신봉하는 자기라는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었고, 자신의 판단력을 믿었고, 자신의 지성을 믿었고, 자신의 신념을 믿었고, 자신의 의지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신봉하던 바울이 한 일이라고는 고작 말씀을 짓밟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의로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영원하기 때문에 말씀은 짓밟히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짓밟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짓밟는 사람은 말씀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실은 영원한 말씀을 외면한 자기 자신을 짓밟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영원한 생명 앞에서 스스로 자기 생명을 거스르는 자기 반역에 지나지 않습니다.

5:10-12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의인을 박해하는 것은 오히려 그 의인이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상을 받도록 그를 돕는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의인을 박해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나님의 화를 자초하는 자해 행위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신봉하던 바울이 말씀을 짓밟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학고 의로운 그리스도인을 박해한 것은, 모두 바울 자신을 스스로 죽이는 백해무익한 자해 행위였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다마스쿠스 길 위에서 바울을 불러 주시지 않았던들, 그는 일평생 자기 생명을 갉아먹는 자해 행위를 하다가 2천 년 전에 한 줌의 흙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은, 설령 천하제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일 뿐입니다. 안개 같은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지키고 구원할 능력은 없습니다.

아마누스 산맥을 넘는 바울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은, 주님과 함께 인생 산맥을 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그가 있는 곳이 곧 영광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다마스쿠스 길 위에서 주님께 사로잡힌 바울은 그 즉각 다마스쿠스에서, 그 이후에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주님께서는 젊은 바울로 하여금 고향 다소에서 13년간이나 칩거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다소로 낙향하기 위해 아마누스 산맥을 거꾸로 되넘어야만 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예루살렘을 향해 아마누스 산맥을 넘을 때와 비교한다면, 젊은 나이에 이룬 것도 없이 고향으로 낙향하기 위해 아마누스 산맥을 되넘는 바울을 사지가 축 늘어진 실패자의 모습으로 연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적인 관점에 기인한 착각 일뿐입니다. 청년 바울이 예루살렘 유학을 위해 처음으로 아마누스 산맥을 넘을 때, 그가 비록 패기만만해 보일망정 그는 혼자였습니다. 그 반면 다소에 낙향하기 위해 아마누스 산맥을 거꾸로 넘을 때, 그는 혼자인 것처럼 보였지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넘었습니다. 아마누스 산맥을 거꾸로 되넘는 바울을 혼자라고 여기는 사람은 모두 젊은 나이에 빈손으로 낙향하는 바울을 실패자라 속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였기에 그는 결코 실패자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오묘한 주님의 뜻이 있을 뿐 실패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에는 춘하추동 사계절이 있습니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의 계절이요, 여름은 성장을 재촉하는 의 계절이며, 가을은 거두어들이는 의 계절이고, 겨울은 거둔 것을 저장하는 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한의학은 1년을 사계절이 아닌 오계절로 나눈다고 합니다. 즉 여름과 가을 사이에 장하의 계절을 별도로 두는데, 이 시기는 만물이 속으로 익어가는 의 계절입니다. 봄에 생명이 움튼 열매가 여름 내내 마음껏 자라다가 장하의계잘이 되면 속으로 무르익게 됩니다. 열매의 모양과 크기는 그대로이지만 속으로, 질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장하의 계절이 이르기 전에 열매를 따면, 이른바 풋열매가 됩니다. 장하의 계절이 없이는 열매가 참된 열매로 무르익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13년에 걸친 칩거는, 이를테면 그 장하의 계절이었습니다. 속으로, 질적으로, 영적으로 무르익는 그 장하의 계절을 통해 바울은 오직 십자가의 가치관으로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인생 산맥을 넘는 사람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가시방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가시방석도 하나님의 자녀를 속으로 무르익게 해주려는, 향기 만발한 장하의 영광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119:67 새 번역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잘못된 길을 걸었으나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119:71-72 새 번역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친히 일러주신 그 법이 천만 금은보다 더 귀합니다.

 

아마누스 산맥을 넘는 바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교훈은, 주님과 함게 인생 산맥을 넘는 사람은, 그의 지난 시간마저도 주님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승화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교 최고의 스승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약성경 4분의 1이나 기록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정도로 격정을 지닌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격정으로 주님을 위해 돌팔매질을 당할 수도 있었고, 끝내 주님을 위해 참수형까지 감수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쓰레기처럼 폐기되어 마땅한 그의 그릇된 삶의 경험들은, 주님 안에서 사도로 살아가는 그의 삶속에서 더없이 귀중한 자산으로 승화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매일 인생이란 산맥을 넘는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은 청운의 꿈을 품고 자신의 야망을 위해 위풍당당하게 인생의 산맥을 넘고 어떤 사람은 이미 자신의 야망이 무산되어, 마치 실패자처럼 풀이 죽어 인생 산맥을 거꾸로 되넘을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새로운 계획을 위해 동일한 인생 산맥을 한 번 더 넘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 산맥을 넘는 사람들의 모습과 행보의 의미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외적 모습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오직 주님과 함께 인생 산맥을 넘을 때에만, 우리의 인생이 참되고 영원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본문의 바울처럼 오직 말씀과 기도 속에서 주님을 모시고,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인생 산맥을 넘어가십시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인생 산맥을 넘는 한, 우리의 손과 주머니가 비어있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인생 산맥을 넘는 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이 우리를 말씀 안에서 농익게 해주려는 향기 만발한 장하의 영광일 것이고, 무의미했던 우리의 지난 시간마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승화될 것이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祈禱)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그동안 우리 자신이라는 우상을 숭배해 왔습니다. 우리의 능력을 믿고, 우리의 신념을 믿고, 우리의 지성을 믿고, 우리의 판단력을 믿고, 우리가 지닌 것을 믿으며, 우리 홀로 우리 인생 산맥을 넘어왔습니다. 그 결과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얻고 성취한 것 같은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동안 우리가 이룬 그 많은 것들 가운데 정작 우리의 생이 끝나는 날 우리를 책임져 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이 시간에도 찾아와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말씀과 기도 속에서 오직 주님과 함께인생 산맥을 넘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주님과 함께 인생 산맥을 넘는 우리에게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그것은 우리를 말씀의 사람으로 농익게 해 주시려는 장하의 영광스런 자리임을 잊지 말게 해 주옵소서. 주님과 함께 인생 산맥을 넘는 한, 비록 우리 자신이 볼 폼 없고 우리의 손과 주머니가 비어 있다 해도,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음을 깨닫게 해 주옵소서. 주님과 함께 인생 산맥을 넘는 우리로 인해, 이 시대 속에서 매일 새날 새 역사가 펼쳐지게 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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