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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격리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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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y 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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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격리의 사람

안석수목사

*본문/ 20:13-16

 

본문 16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 일행이 도착한 밀레도는 에베소 남쪽 4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에베소는 바울이 무려 3년이나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3년 동안 정들었던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배를 타고 오면서 지척에 있는 에베소를 그냥 지나쳐, 에베소 남쪽 밀레도로 직행하였습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사렘에 이르려고 급히서둘렀습니다.

6에 의하면 바울은 빌립보에서 무교절을 지냈습니다. 유월절 다음 날부터 시작되는 7일 동안의 무교절을 빌립보에서 지낸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드로아에 가기 위해 에게해를 건너는 데 5일이 걸렸고, 드로아에서 7일을 체류하였습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걸어가는데 이틀만 걸렸다 쳐도, 16의 기록처럼 앗소에서 배를 타고 밀레도에 닿기까지 소요된 4일을 합치면, 바울이 밀레도까지 가는 데 6일이 걸린 셈이 됩니다. 그 날 수를 모두 합치면, 빌립보에서 유월절을 맞은 바울은 밀레도에 이르기까지 총 25일을 소요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앞으로 가야 할 밀레도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빌립보에서 밀레도까지 온 거리보다 두 배나 더 멀었습니다. 자칫 지중해에서 폭풍이라도 만나 배가 표류한다면,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당도하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오순절 전에 여유 있게 예루살렘에 당도하기 위하여, 3년 동안 목회했던 정든 에베소를 지척에 두고서도 그냥 지나쳐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바울이 왜 굳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당도하려 서둘렀는지, 그 이유를 유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일행으로부터 자신을 자발적으로 격리시켜,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홀로 고독하게 걷는 하나님과의 독대를 통해, 결박과 환난이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이 3차 전도 여행의 최종 목적지임을 분명하게 확인한 것입니다. 자신의 3차 전도 여행의 최종 목적지가 예루살렘임이 확인된 이상, 바울은 한순간이라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주어진 소명의 길을 향해 지체 없이 계속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예루살렘행이 바울에게 경제적 이득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미래를 위한 기득권을 보장해 주는 것도 물론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할 출세나 성공의 길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결박과 환난이 도사린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결박과 환난의 길에 자신의 생명을 던지기 위해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 진정한 목적은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주님의 도구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 자신의 전 인생을 맡긴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우리와 똑같은 성정의 인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결단과 실행의 삶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울이 자신을 격리시켜 하나님과 독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첫째, 자기 격리를 통해 하나님과 독대하는 사람만 이 세상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용기를 끝까지 지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가려는 길은 결박과 환난이 도사린 길입니다. 그 끔직한 투옥과 테러를 또다시 당해야 하는 길입니다. 이미 유경험자인 바울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길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독대하는 자기 격리를 통해서만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는 용기였습니다. 용기의 출처가 인간 자신이라면 그것은 도리어 자신을 무너뜨리는 만용이거나 허세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용기만, 어떤 상황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진정한 용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어느 쪽이 정의이고 불의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불의와 더 자주 손을 잡을까요? 참을 추구해야 함을 뻔히 알면서도, 왜 습관적으로 거짓과 타협할까요? 그것은 두려움과 욕심 때문입니다. 말씀과 참을 좇을 때 당할지도 모르는 불이익과 불편과 소외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불의와 거짓의 벗이 됨으로써 더 많은 유익을 누리려는 욕심입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두려움과 욕심은 인간의 만용과 허세로는 절대로 제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기로만 가능하고, 그 용기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기 격리를 통해서만 채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자신을 격리시켜 하나님과 독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영으로 우리 안에 임해 계심을 재확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해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힘입어 제압하지 못할 두려움과 욕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메시지는, 자기 격리를 통해 하나님과 독대하는 사람의 삶은 결과적으로 주님 안에서 이 세상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지중해를 누비고 다녔고, 마침내 결박과 환난이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해 죽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주님의 증인-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전 생애를 걸쳐 그의 전도로 얻은 그리스도인의 수를 다 합쳐도, 서울에 있는 중형 교회 한 곳의 교인 수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의 위대함은 그가 전도한 사람의 수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로마제국이 새로워졌고, 유럽의 역사가 새로워졌으며, 세계사의 물줄기가 새로워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자기 생명을 포함하여 자신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렸을 때, 바울을 도구 삼으신 주님에 의해 결과적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포함하여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하나님게 드리기만 하면, 우리의 삶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기 격리의 사람만 가능한 것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메시지는, 기 격리를 통해 하나님과 독대하는 사람만 시간을 허투루 허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행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켜 하나님과의 독대를 통해 결박과 환난이 도사린 예루살렘행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한 바울은, 지체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3년 동안 복음을 저냈던 정든 에베소를 그냥 지나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을 욕망에 무의미하게 겉날려 버립니다. 태만으로 날리는 사람들도 있고, 쾌락으로 날려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루가 동일하게 24시간입니다. 무의미하게 날려 버리는 사람들과 욕망으로 날려 버리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시간을 영원으로 건져 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결과 100년을 살아도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바울처럼 참수형을 당해 죽어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아있는 인생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자기 격리를 통한 하나님과의 독대 여부에 의해 판가름 납니다.

 

스마트폰 시대에 접어든 요즘에는 손안에 온 세계가 들어 있습니다. 손안에 든 스마트폰을 통해 온통 지구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까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이미 영으로 우리 안에 인해 계시지만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켜 기도를 통해, 말씀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독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임해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도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스마트폰을 손안에 들고 있으면서도 전원을 켜지 않거나, 배터리를 충전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격리를 통해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은, 하나님과 접속하기 위한 영적 전원을 켜는 것이오, 하나님과의 접속을 게속 유지하기 위해 영적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 속에 이미 임해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느끼면, 하나님의 것들로 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우리는, 불의에 굴하기보다는 정말 말씀대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을 때가 더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 기도를 통해, 말씀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기 격리의 삶이 되십시다. 말씀의 길을 좇으려는 우리의 뒷덜미를 끌어당기는 두려움과 욕망을 제압하는 용기도, 세상을 새롭게 하는 주님의 도구로 살아가는 삶도, 매 순간을 영원으로 건져 올리는 지혜도,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기 격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독대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자기 격리는, 하나님과의 자기 연합을 향한 첫걸음임을 꼭 기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祈禱)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과 독대하기 위해 우리를 격리시키는 것은, 종이처럼 연약한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께 접붙이는 자기 연합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기 격리를 통해 하나님의 강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품성으로 채움 받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말씀과 참을 좇으려는 우리의 뒷덜미를 끌어당기는 두려움과 욕망을 제압하는 용기를 지니게 해주시고, 우리의 생명인 소중한 시간을 무의미하게 겉날려 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매 순간을 영원으로 향하게 해주시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이 이 시대와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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