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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갈릴리 사람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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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Jan 28, 2019
  • 조회 943

갈릴리 사람들아

안석수 목사

*본문/ 1:8-11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라는 마지막 명령을 남기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볼 수 있는 육신을 지니신 채로, 제자들의 눈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경이와 경탄 속에서 제자들의 온 시선은 하늘로 오르시는 예수님께 집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부활과 더불어, 어떤 인간도 흉내 낼 수 없는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이심을 확인시켜 주는 확고한 증거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방금 목격한 그 신비롭고도 황홀한 광경에 사로잡혀 계속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천사들이 제자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1:11-“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시라 하였느니라.”

천사들이 황홀경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을 주님의 제자들이여 혹은 사도들이여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천사들은 그들을 향해 갈릴리 사람들아하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던 날 밤 대제사장 집 뜰에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향해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단순히 갈릴리에 거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태어난 갈릴리 출신의 사람임을 강조하는 호칭입니다.

여전히 넋을 잃은 채 하늘만 바라보는 제자들을 천사들이 갈릴리 사람들아하고 불렀습니다. 그 극정인 순간에 천사들이 제자들의 정체성, 다시 말해 그들이 갈릴릴 출신임을 새삼스럽게 일깨워 준 것입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그 황홀한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무려 3년이나 밤낮으로 함께 살았습니다. 3년동안 직접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과 기사를 목격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확인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광경까지 눈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목격한 제자들이야말로 분명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이 땅을 거쳐 간 사람들 가운데 이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고 목격한 사람은 그 열한 명이 유일합니다. 따라서 하늘을 계속 쳐다보던 제자들이 그 순간, 특별히 선택 받은 자신들에게 느꼈을 자부심과 자긍심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때 천사들이 갈릴리 사람들아하고 그들을 불렀습니다. 당시 빈민들이 모여 살던 갈릴리는 가난과 무지와 보잘것없음의 상징이었습니다. 천사들은 제자들이 바로 그 갈릴리 출신임을 깨닫게 하며, 예수님의 승천까지 직접 목격하는 영광을 누림으로 인해 행여 제자들이 빠지게 될 교만의 위험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갈릴리 출신의 초심, 즉 겸손함을 잊지 않도록 일깨워 주었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에서만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란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들인데, 오직 겸손한 사람의 마음속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담기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 여집사님이 목사님에게 보낸 이메일입니다.

 

저는 모 교회 집사이자 구역장의 안사람입니다. 제 남편은 가족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면서 자신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항상 옳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남편이 겉으로는 모범적인 기독교인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주일성수는 말할 것도 없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 년 365일 새벽 기도회에도 어김없이 참석합니다. 웬만한 신앙 서적은 거의 다 읽어 굉장히 박식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어쩌면 저렇게 믿음이 좋을까..........”하며 남몰래 당하는 저의 상처와 아픔을 미처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또 출세욕은 누구 못지않아 교회와 세상에 한 다리씩 걸치고 있습니다. 남들에게 뒤질까봐 쉬지도 못합니다. 딸아이에게도 매일 공부, 공부 닦달입니다. 사랑이 없는 아빠, 말뿐인 사랑,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전혀 딴판인 가정생활. 행함과는 거리가 먼 믿음의 열심, 자신은 항상 상대에게 용납되어야 하면서도 상대를 용납지 않는 이중성 등 아빠에 대한 딸아이의 시선이 날카롭기만 합니다. 저는 이런 기막힌 삶을 살아오면서, 신앙은 있지만 저처럼 고통받는 주부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며 믿음으로 이기려 해보지만, 남편에게 상스러움 욕을 들으며 구타당하고 나면, 정신적인 피폐함과 자존감 상실로 아무 생각도 없이 무기력해질 뿐입니다. 하도 멍청이라고 구박을 받아 제가 정말 하나님께도 아무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지면서 진짜 멍청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집사님의 눈물겨운 호소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분의 남편은 어김없이 새벽 기도회까지 참석할 정도로 누구보다 교회 생활에 열심입니다. 신앙 서적을 많이 읽어 풍부한 신앙 지식도 겸비하고, 교회와 구역에서는 모범적인 집사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토록 신앙생활에 열심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정생활은 이미 우리에게 알려진 바와 같이 엉망진창입니다. 그가 이렇듯 이중적인 삶을 사는 단 하나의 이류를 찾는다면 무엇일까요? 재론의 여지도 없이 교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머릿속에만 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영적 호기심과 허영심을 채워주는 도구일 뿐, 그 말씀이 마음을 감동시켜 삶으로 나타나는 생명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생각만 지닌 교만하기 짝이 없는 인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교만을 특정 행동과 연관지어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인사를 잘하지 않는다든지, 말투가 고분고분하지 않다든지 하는 행동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를 겸손이라 판단합니다. 그러나 방금 그 남편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교회와 구역에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얼마나 극진하게 인사하고 또 얼마나 예의를 갖추어 말하겠습니까? 교회 성도들은 필경 그를 겸손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이 경우만 보더라도 교만과 그 반대의 개념인 겸손은, 특정 공간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행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의식하든 못하든 결과적으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크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초등학생이 매사에 담임선생님보다 자신이 옳다고 우긴다면, 그것은 결국 그 어린 학생이 선생님보다 자신이 더 크다고 착각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그 남편이 성경 말씀을 절대 순종해야할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던들, 그는 말씀을 마음에 담고 그 말씀의 지배 속에서 살았을 것이요, 그랬다면 교회생활과 가정생활이 그토록 겉과 속이 다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만한 인간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자신이 본디 갈릴리의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거나 망각한 인간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울리고 자식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 그 교만하고도 한심한 남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 호기심과 허영심의 대상으로 삼을 뿐 그 말씀을 좇아 살려고 하지 않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와 우리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아는 대로 살지 않습니까? 그 대답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갈릴리 사람에 불과한 우리의 정체성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전4:7 -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

교만에 빠진 우리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입니다. 대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역자로 구별되었습니까?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자격으로 인함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본래 죄와 사망의 노예이던 우리는 영적 빈곤과 무지 속에 내버려진 보잘 것 없는 갈릴리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43:1)

선언하신 주님의 절대 주권, 주님의 일방적인 선택의 은총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또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올 때 벌거숭이로 빈손으로 오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내게 있는 것 중 본래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내 생명부터 시작하여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받은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을 떠나 갈 때 벌거숭이로, 빈손으로 가지 않을 사람이 과연 단 한 명이라도 있겠습니까? 내가 현재 가진 것이 태어날 때부터 있어 온 나의 소유라면 갈 때도 그것을 들고 가야 마땅하겠지만, 누구나 어김없이 빈손으로 간다는 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것을 빌려 쓰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받지 않은 것처럼, 마치 본래부터 우리 소유인 것처럼 자랑하면서 하나님보다도 그것들을 더 신봉합니까? 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리의 능력과 판단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막상 삶의 현장에서는 왜 하나님을 자기 지갑 속의 돈보다도 더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벌거벗은 갈릴리 사람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에 지나지 않던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제자로 말씀의 사도로 구별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별해 주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2천 년 전 갈릴리에서 이름도 없이 한 줌 흙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직접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표적과 기사를 보고,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증인이 되고, 예수님의 그 황홀한 승천마저 목격한 것은,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모두 주님께 받은 일방적인 은총이었습니다.

받은 은총이 그토록 큰 만큼 제자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 모든 것을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로 처음부터 자신들의 것 인양, 자기 의로, 자기 자랑거리로 내세우며 하나님을 망각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죄성이자 본성이요, 한계인 까닭입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이시기에, 제자들이 그 어느 때보다 스스로에게 더 큰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낄 승천을 목격하는 현장에서 천사들을 통해 그들을 갈릴리 사람들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까지 목격한 것이 제자들의 교만하지 않고 도리어 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갈릴리 사람들아라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을 더 믿고 따르는 우리의 교만을 깨닫게 해 주시려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믿고 따르는 이 교만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의 신앙 연륜이 아무리 깊어진들, 아내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자식의 마음에 온갖 상처를 낸 문제의 그리스도인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한 마음만이 우리 신앙의 출발점인 동시에 텃밭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즐기던 교만한 삶에 마침표를 찍읍시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그 말씀이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때야 우리는 교회에서 성도들을 대하는 바로 그 모습으로 가정에서 아내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배당 안에서 미소짓는 상냥함으로 남편을 섬길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의 자녀를 대하는 인자함으로 자기 자식을 위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보시는 친절함으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개혁은 인간의 깃발이나 구호, 운동이나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개혁은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겸손한 마음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고 우리를 통로로 삼아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 이것만이 참된 개혁이요,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갈릴리 사람들로 칭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祈禱)

죄와 사망의 노예로 영적 무지와 빈곤의 갈릴리에 버려져 있던 우리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해 주셨습니다. 빈손으로 세상에 온 우리가 지금 가진 것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것을 더 믿고 따르는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래 갈릴리 사람이었던 우리의 정체성을 재확인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도와주옵소서. 그 겸손함으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 변함없는 갈릴리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그와 같은 삶을 통해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개혁, 진정한 생명의 역사가 날마다 이루어지게 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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