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어져 가는 우리
안석수 목사
*본문/ 행 11:1-3, 18
어린 아이의 특성이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것이라면, 성숙한 사람의 특성은 하기 싫은 것도 기꺼이 행하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자기중심적이므로 하고 싶은 것만 골라 하려는데 반해, 성숙한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하기 싫은 것도 자발적으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숙한 사람일수록 이기적이어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 속상해 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항상 모두를 생각함으로 하기 싫은 것을 하고서도 기뻐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미숙의 우물 속에 가두는 것이기에 그것은 결국 자해 행위로 끝나기 마련이지만, 모두를 위해 하기 싫어도 하는 것은 자기 성숙의 경지를 넓혀 가는 것이기에 그것은 언제나 자신과 타인을 더불어 유익하게 합니다.
성숙과 미숙은 당사자의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려는가 아니면 하기 싫은 것도, 행하는가에 의해 판가름됩니다.
엡 2:20-22에서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정의 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여기에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전해 준 말씀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의 터전을 스스로 찾아, 그 말씀의 터전 위에 자력으로 선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그 말씀의 터전 위에 세우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시고 말씀의 터전 위에 세워 주셨습니다. 마치 미숙한 어린아이 같아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골라 하던 유치하기 짝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하시어 말씀의 터전 위에 세워 주신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처럼 유치하던 우리를 새롭게 지어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인생을 위한 모퉁잇돌, 즉 주축돌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건축의 견고성은 주춧돌, 다시 말해 그 기초에 의해 결정됩니다.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분명하고 더 견고한 인생의 주춧돌이 이 세상에 어디에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어제 싫말 씀의 터전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춧돌로 삼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지어져 간다는 것 역시 우리가 매일 어제보다 새로워져 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어제보다 오늘 이 더 새로워질 것입니다. 지난해보다 올해가 더 새롭고, 연초보다 연말이 더 새로우며, 결과적으로 노년에 이르러서는 새로움의 극치를 이루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로 새롭게 지어져 간다는 것은, 어제 하기 싫었던 것을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기꺼이 행하는 사람이 되어 감을 뜻합니다.
어제 하기 싫었던 것을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제보다 그만큼 더 성숙해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하기 싫은 것을 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바르게 건축하는 것임을 깨달았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약이 쓰다고 좋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좋은 약은 늘 쓰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 쓴맛 속에 인체에 유익을 주는 약의 효능이 들어 있습니다. 몰론 병들지 않았다면 약을 먹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쓴맛의 약을 억지로라도 먹어야 하는 이유는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싫어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심령이 병들었음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때로 쓴맛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 말씀이 우리를 살리고 바로 세우는 효능을 지니고 있음의 반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싫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 말씀만이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소아병을 고쳐 주는 치료제요, 그 말씀 속에서만 우리가 날로 새로이 지어져 갈 수 있고, 그 말씀에 의해서만 우리의 인생이 영원토록 견고히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과의 교제를 엄금하는 유대인의 관습법을 스스로 파기하면서까지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찾아가 고넬료와 그의 일행에게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 일행에게 세례를 베푼 것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심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방인 고넬료 일행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한 베드로에게는, 이방인과 식사를 금기시하는 유대인의 관례를 깨뜨리고 그들과 더불어 며칠씩이나 함께 지내며 식사를 나누는 것 또한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평소라면 하기 싫어했을 그 모든일을 베드로가 기꺼이 행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베드로에 의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주님의 마지막 명령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수행하는 물꼬가 비로소 트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기 싫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한 베드로에 의해 교회의 교회다움이 확립된 것입니다.
그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의 환영이나 환대가 아니었습니다. 할례파 유대인들의 혹독한 비난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이행하기 위해 싫어도 수고와 헌신을 마다하지 않고 귀환한 베드로를 보면, 다른 사람도 아닌 같은 그리스도인으로부터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잘 알려진 것처럼, 본래 성미가 불같이 급하고 또 변덕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할례파 유대인들이 부당하게 비난하는 지금이야말로 베드로가 불같이 화를 내어야 우리가 아는 베드로다운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편안히 지내던 주제에, 주님을 위해 먼 길을 다녀오는 사람에게 비난이라니 대체 무슨 짓들이냐고, 그러고도 너희들이 감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도리어 베드로가 그들을 비난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뜻밖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 11:3-4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대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베드로는 할례파들의 부당한 비난에 동일한 비난으로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불처럼 화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놀랍게도 자신을 비난하는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상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못마땅하거나 자존심 상해하며 결과만을 통보해 준 것이 아니라, 왜 자신이 가이사랴에 갔었는지, 시작하여 하나도 빠짐없이 온 성의를 다해 차례대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내용이 행 11:5-17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한 일을 하고서도 같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혹독하게 비난받는 기막힌 상황 속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빠짐없이 설명한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심과 자제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베드로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제라면 마땅히 싫어했을 일을, 오늘 그는 온 성의를 다해 기꺼이 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날로 새롭게 지어져 가는 베드로가 어제라면 싫어했을 일을 오늘 기꺼이 행하였을 때, 다시 말해 자신을 부당하게 비난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것을 성의를 다해 차례대로 설명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떠했었는지는 11:18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 하니라.”
베드로의 설명이 끝났을 때 베드로를 비난하던 사람들 가운데 감히 입을 열어 베드로를 제공박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자신을 부당하게 비난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초지종을 차례대로 설명하는 것이 싫다 하여 자기 역시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했더라면, 그는 동료 그리스도인도 잃고 성경이 전해 주는 바대로의 사도가 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바의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도,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도, 자신을 부당하게 비난하는 예루살렘 교인들 앞에서도, 싫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마땅히 행하여야할 바를 행함으로, 베드로는 이방인을 살리는 것은 물론이요 이방인에 대한 동료의 눈까지 열어 주었을 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인생은 단순히 재미를 좇아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놀이가 아닙니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영원한 집으로 중단 없이 지어져 가는 삶의 여행입니다. 지어져 간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무의미한 반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현재진행형으로 지어져 간다는 것은 계속 지어지고 있음을 뜻하기에, 그것은 항상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을 의미합니다.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였던 베드로가 주님 안에서 말씀을 좇아 계속 지어져 감으로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되는 미래를 얻었던 갓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계속 지어져 가는 한, 우리가 하기 싫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마무리함으로 이 한해를 잘 매듭지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한 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바르게 매듭지어져야 바로 그 매듭 위에,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새로운 미래를 얹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祈禱)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베드로를 위한 말씀의 터전이 되어 주시고, 또 베드로의 인생을 위한 주춧돌이 되어 주셨습니다. 베드로 또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을 알고 행하였습니다. 이처럼 베드로가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매일 지어져 가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위대한 사도라는 미래를 열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안에서 매일 말씀을 좇아 지어져 가는 사람이 아니었던들, 무식한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로서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도 단지 싫다는 이유로 회피했던 일들을 이제부터 시작하여 매듭짓게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올해에는 주님 안에서 말씀을 좇아 매일 새롭게 지어져 가는 우리를 통해, 이 암울한 시대 속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