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믿음의 여정
안석수 목사
*본문/ 창 21:1-6
아브라함 믿음의 여정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곳은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그는 거기에 있을 때 부족할 것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족장의 권력과 명예, 풍성한 물질, 좋은 인간관계 등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와 사라 사이에 자녀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그에게 나타나시어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창 12:1-3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 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이와 같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통하여 믿음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고, 더불어 놀라운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뛸 듯이 기뻤을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70세였을 때 태어났습니다. 비록 그의 나이가 75세였기는 하지만 아버지 경우를 생각해 보면 출산의 가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수년이 훌쩍 지나도 소식이 없습니다. 물론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기근으로 애굽으로 내려간 일, 아내를 빼앗길 뻔한 일, 조카 롯과 헤어진 일 등, 이 모든 과정 가운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카 롯과 헤어진 후에는 아들에 대한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섭섭해 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창 13:15-16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하나님은 이렇게 재차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아들을 빨리 주시지 않으므로 차라리 집에서 기른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로 양자를 삼는 것이 좋겠다는 원망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단호하게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믿었고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지연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약속을 더디 실행하시는 것일까요? 사실 신앙생활은 약속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준비하여 둘로 쪼갠 제물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비록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계약 체결이지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자신을 속박하신 약속입니다. 무조건적이며 영원한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저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내 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기다리는 것이 때로 힘이 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지쳤고 사탄의 음성이 들립니다. 누군가가 사라에게 그랬을 것입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사래 당신에게 문제가 있어 자식이 들어서지 않을 수도 있으니 당신의 몸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들여보내 봐요. 혹시 알아요? 아들을 낳아 줄지?”
씨받이를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하자 아브람은 기다렸다는 듯 덥석 수용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전에는 양자를 들여도 되는지 여쭤 봤지만, 이번에는 이 일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아브람의 행동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사실 여자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때가 많습니다. 곧이곧대로 듣다가는 실수합니다. 남자는 그것을 분별해서 현명하게 처신해야 노후가 편안한 법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두고두고 원망을 듣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담이 하와의 말을 들었던 것처럼 사래의 말을 듣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들이 얻은 것은 ‘약속의 아들’이 아니라 ‘육체의 아들’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아들을 낳고 교만해진 하갈과 이스마엘로 인해서 아브람 가정은 불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랍 민족과 유대 민족 간의 갈등과 투쟁의 단조가 되었습니다. 사래는 당시 풍습대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자식을 얻어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 부부는 결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탄생은 사탄의 유혹에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대치할 수 없었습니다.
이 일 후에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13년간의 긴 침묵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으면 오랜 시간 성령의 임재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심판이요, 형벌입니다. 아브람 60세에 이스마엘이 태어났고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가 99세 때이기 때문입니다. 13년은 아브라함 생애의 공백기이며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거리이기도 합니다. 약속을 믿지 못하고 육신의 방법을 구사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핵서 하나님께서 그를 버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불성실했다고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두 부부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로 바꾸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주실 터인데 그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로, 사라는 열국의 어머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날 아이에게 이삭이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절망하고 죄책감을 지니고 살던 부부에게 새로운 비전을 보여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저는 허황된 기대는 품지 않겠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아픔도 크더군요. 기왕에 주신 아들 이스마엘이 있으니 그 아이나 크게 만드시고 그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세요.”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자신의 방법을 하나님이 인증해 주시기를 요구하고, 나중에는 타협안을 제시하지만 하나님은, 일관되게 언약을 말씀하시고 수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불가능과 만날 때에 그 빛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불신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 이전에 인간적인 가망성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천사들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는 결코 먼 미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몇 번 만났지만 이처럼 시한을 못 박은 약속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의심하고 믿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지 않을 이유를 속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마치 체념한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앙이 발견됩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세상적인 지식이 오히려 그들의 믿음의 눈을 약화시키고 볼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둘 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믿지 않을 구실을 삼았습니다. 믿음은 때로 이성적인 것과 다릅니다.
믿음은 보는 방식대로 이해하지 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기보다는 희망이 없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포기하고 있습니다. 약속은 허무하게 들리고, 이치에 어긋나 보입니다. 이런 경우 아이를 갖게 하는 것보다 그것을 믿게 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마치 구원해 주는 것보다 구원을 믿게 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처럼 말입니다.
아브라함 부부의 완고한 불신에 대하여 천사가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근본적인 지식을 제시합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이 질문은, “네가 정말 하나님을 믿느냐?”하는 질문과 같습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만일 “예, 하나님도 때대로 못하시는 일이 있더라고요”라고 대답한다면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 나님이 아니십니다. 또한 여러분은 믿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니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절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상식도 알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ale는 것입니다. 아는 대로 살지 않고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스텐퍼드 대학에서 오랫동안 수학과 학과장을 지냈던 유수한 수학자 조지 댄지그의 학창 시절 일화입니다.
수학과목 기말고사 때문에 밤새워 공부하다가 늦잠을 잤다고 합니다. 부랴부랴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이미 시험 문제를 풀고 있었고 칠판에 세 문제가 적혀 있었습니다. 황급히 시험문제를 푼 뒤에 칠판에 적힌 보너스 문제를 풀려고 할 때 종료 벨이 울렸습니다. “교수님, 시험 시간 후에 풀어 제출하면 안 될까요?” “그럴 것없네. 집에 가서 풀어와도 돼.”
조지 댄지그은 기숙사로 돌아와 그 문제를 풀었는데 어렵긴 어려웠습니다. 두 문제는 간신히 풀고 한 문제는 도저히 풀 수가 없어서 푼 문제만 제출했습니다. 기숙사에 돌아와 잠을 청하려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교수님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 문제를 풀었지?” “에이, 그래도 한 문제는 풀지 못한 걸요.” “무슨 소리야, 이건 수학 난제야, 아인수타인도 풀지 못한 것일세. 나는 그냥 학생들 애를 먹일가 해서 적어 놓은 것인데 그 문제를 풀다니........”
그는 아인슈타인도 풀지 못한 문제를 두 문제나 푼 것입니다. 사실 교수님은 칠판에 적을 때에 학생들에게는 “어려운 문제”라고 말해 주었고 학생들은 “네 주제에 어떻게 저런 문제를 풀겠어?” 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을 것입니다. 늦게 강의실에 들어간 조지 댄지그는 그 말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아예 품지 않았기에 도전했고 결국 두 문제를 풀어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헛된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약속하신 것은 분명히 이루시는 분입니다. 일 년이 지났을 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안아 볼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라를 웃게 하셨습니다. 이 웃음은 불신앙의 비웃음이나 실없는 웃음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돌아보신 것을 감사하는 웃음이요, 기쁨의 웃음이었습니다.
창 21:6 -“하나님께서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사람이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비로소 확고히 믿게 되었습니다.
祈禱)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지만, 그는 그저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더 힘이 들었습니다. 지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사탄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약속의 아들이 아닌 육체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대치할 수 없었습니다. 13년간이나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공백기가 생겼습니다. 약속의 성취가 더디어지자 약속은 허무하게 들리고 이치에 어긋나 보였습니다. 완고한 불신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었느냐?”“너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느냐?”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헛된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심을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 우리가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 시간 우리들의 온 마음으로 믿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