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가 주는 메시지
안석수 목사
* 본문/ 욥 38:1-7
욥기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욥이 어떤 죄로 인해서 그런 극한의 고난을 겪게 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욥이 고난 받은 이유에 대해서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인생은 신비로운 것이라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우선 이런 하나님의 물음은 “식물학과 동물학과 천문학 같은 기초도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 초자연적인 것을 이해하겠다고 하느냐? 어떻게 나를 이해했다고 하느냐?”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물의 경이로움에 감탄시키며 새로운 눈으로 우주와 삶을 보라고 설득하는지도 모릅니다.
“네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문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자연만물을 보아라 경이롭지 않니? 아름답지 않니? 신비롭지 않니? 나는 그런 존재다. 나는 지금 너에게 새로운 일을 진행하고 있단다.”
문제에서 눈을 옮겨 우주와 자연을 통하여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려 보라고 하십니다. 물론 그 문제가 사소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 문제에 집착해서는 도저히 문제에서 헤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문제 대신 하나님을 묵상하라고 주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 목적이 전자이든 후자이든 인생은 신비로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왜 고난이 닥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감내해야할 따름이었습니다. 경외심으로 순종하면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욥에게 그런 고난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막아주셔서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합당한 이유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태였습니다. 마침내 믿음을 지키기 힘든 지경이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제기한 의문에 답변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언제나 모든 일에 대해서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잇는 것은 아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알듯 알 듯 하면서도 모르고,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습니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 인내하라. 아주 낯선 방언으로 씌어져서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을 대하듯, 의문 그 자체를 사랑하려고 애쓰라. 당장 답변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 풀리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지금 답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혹 알려 주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의문을 던지며 사는 것이다. 지금은 의문과 더불어 살라. 그러면 서서히, 자신도 모르는 새, 그 해답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 잠깐 존재하고 있고, 하나님은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t라면서 유한한 지식과 제한적인 능력으로 하나님을 모두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들은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주와 동물 세계도 모르는데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욥의 무지와 무능을 드러냅니다. 그는 창조 때에 없었고, 자연의 힘을 설명할 수 없고, 하나님의 방법을 거스릴 수 없고, 자연의 힘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욥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한때는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은 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의 일각이 살짝 노출되어도 인간은 당황하고 압도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많고 깊습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사람이 누구냐?”라는 질문은 욥으로 하여금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미련함을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지혜를 반박할 수 있느냐?”“네가 하나님의 정의를 판단할 수 있느냐?” “네가 하나님의 능력을 판단할 수 있느냐?” “네가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할 수 있느냐?”
욥기, 잠언, 전도서, 모두 지혜 문학이지만 욥기가 주장하는 지혜는 “자기의 한계, 즉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제한적인가를 주목하게 합니다. 우리가 지닌 의로움, 능력, 지식은 상대적일 뿐,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결코 설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줍니다. 겸허하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는 사람, 자신의 무능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자신의 무식을 알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자신의 입을 막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여 용서해 주시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능력함을 알게 해서 힘을 주시고,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식함을 알게 해서 지혜를 주십니다.
인생에는 알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지식에서 믿음으로, 논쟁에서 경청으로, “왜”에서 “어떻게”로 나가야 합니다. “왜” 고난을 받는지에 대한 이유보다는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을 도우며 살 것인가에 더 우선적인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의로운 욥의 고난은 의롭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억울하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시는가?” “하나님이 왜 그런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더 힘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시는가?” “하나님은 무기력하신 것이 아닌가?”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정도는 악할지언정 누구나 이런 의구심과 불신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욥기를 욥의 고난, 왜 선한 사람에게 악한 일이 생기는가의 관점에서 보아온 종전의 관점은 욥의 성품이 변화라는 관점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 생각”을 품고 계셔서 악조차도 선을 이루시는 데 쓰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욥은 풀무와 같은 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한 뒤에 더 큰 광명한 빛 가운데 나오게 되었습니다. 고난이 욥에게 가져다 준 선한 영향력은 큽니다.
고통은 확실히 인격을 연단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마치 한 조각의 석탄과 같았던 욥을 다이아몬드로 만들었습니다. 석탄에 불을 붙이면 한동안 타오르다가 결국 한 줌의 재가 됩니다. 쓸모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단한 가치를 진닌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석탄이 땅 속 깊은 곳에 묻혀 수만 년 동안 강력한 지열과 압력을 받게 되면 세상에서 가장 견고하고 값진 다이아몬드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문제로 압력과 열을 받게 되면 다이아몬드와 같은 귀중한 성품으로 변화됩니다.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고통의 기간을 통하여 낡은 것은 퇴장하고 새로운 것이 등장합니다.
시몬 베유 “기독교의 위대함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점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고통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고통이 그리스도인을 성숙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심으로써 어떤 과정으로 선을 일구어 내실까요? 첫째는 무감각했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한 분인지를 보여 주고,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의 공허한 삶에 들어오시며, 셋째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십니다.
도널드 맥컬로우가 쓴 <광야를 지나는 법>에 보면 “하나님은 어려움과 고통으로 우리의 주의를 먼저 끌고 우리를 잠잠케 하신 뒤에 우리를 고쳐 주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통은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힘이 업고, 의도 없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일깨워 줍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사람의 문제는 자기가 최고라는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럴 지라도 고통을 통해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주 큰소리로 폭풍우 가운데 말씀 하십니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주님은 조각가처럼 그를 조각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만들어 나가십니다. 조각가들은 재료를 붙여 나가는 조소 기법과 재료를 깎고 다듬는 조가 기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걸작품으로 만드시어, 두 가지 방법 모두를 사용하십니다. 조각 기법은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조각칼, 톱, 대패, 망치, 끌, 사포기로 우리의 죄, 욕심, 이기심, 교만,, 미움, 완악함을 다루십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형상이 이루지기까지 말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도덕적 영적 세계관을 넓히는 영적 코페루니쿠스 혁명을 경험합니다. 욥의 영적인 체험은 자신의 자아를 확장시키고 전통적인 도덕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했습니다.
영적인 체험은 인간을 지혜롭게 하고 도덕적으로 성숙시키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 됩니다. 고난을 거쳐 욥의 성품이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태도, 자녀에 대한 태도, 인생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피상적으로만 알던 것에서 직접 경험하는 놀라운 단계로 나아갑니다.
욥은 세상뿐만 아니라 자신을 터무니없이 비방한 친구들을 끌어안았습니다. 당시 문화 속에서 남자 자녀들만 상속받던 관행에서 벗어나 딸에게도 유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 자체가 더 겸허해지고 진지해집니다. 이 모든 성품이 변화는 고통이 가져다 준 선물이며 열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욥처럼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또 다른 악으로 빠질 뿐입니다.. 따라서 고난에 처한 사람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은 초연의 경험, 약간의 거리 두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하나님만을 앙망해야 함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아멘
祈禱)
하나님 아버지, 문제에서 눈을 옮겨 우주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려 보게 하시고 우리는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 잠깐 존재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사람이 누구냐?”하시며 우리 자신의 미련함을 돌아보게 하심 또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왜 고난을 받는 이유보다는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야함을 말씀해 주시고, 우리들이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고통의 기간을 통하여 낡은 것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함을 욥기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한 분인지를 보여 주고, 하나님이 우리의 공허한 삶에 들어오시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하나님만을 앙망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