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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헛된 일을 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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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y 06, 2018
  • 조회 4422

헛된 일을 버리라

  안석수 목사 

*본문/ 14:15-18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까닭은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혔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버리라고 말한 이런 헛된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바울이 자신을 헬라 신화의 헤메르스로 경배하려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외쳤으므로, 이런 헛된 일을 버리라는 것은 허황된 헬라 신화를 믿거나 사람이 사람을 숭배하는 헛된 일을 버리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바울이 한 말의 일차적 의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은 그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은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본문 16입니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니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이 자기 판단을 좇아 사는 것을 방임하셨다는 것입니다. 방임하다란 단어는 묵인하다’, ‘용납하다’, ‘허용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모든 죄를 하나님께서 무조건 다 용납하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기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유보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절을 보면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기 전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친히 계시하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 17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기 전에도 하늘의 태양, 때를 따라 내리는 비, 결실을 위한 계절의 변화 등, 자연계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밤낮으로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침마다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계절의 변화를 이끄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신으로 섬기고 경배했습니다. 태양이나 나무, 바위와 짐승처럼 눈에 보이는 자연들을 신으로 경배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2천 년 전 지중해 사람들은 그들이 믿던 헬라 신화 속의 열두 신 모두 인간의 형상을 지닌,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신을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신은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체를 지닌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헛된 일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숭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려는 헛된 일을 버리라고 권면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눈이 보이는 것을 숭배하는 것이 헛된 일일까요? 눈에 보이는 것은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인 까닭입니다. 언젠가 소멸해 버릴 것을 숭배하느라 자기 인생을 건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생을 허비시키는 첩경일 것인즉, 유한한 인간에게 그보다 더 헛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유사 이래 인간이 신이라 숭배하던 모든 것들과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차이는, 오직 하나님만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형체를 지녔다는 것은 그 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이미 시간과 공간의 지배 속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만든 신 가운데 몸통 양쪽에 여러 개의 팔을 지닌 신상이나, 얼굴에 여러 개의 눈이 달려 있는 신상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신상에 눈과 손을 천만 개씩 붙인다 한들 그 신상이 70억 인구를 주관할 수 있겠습니까? 신상에 일만 개의 눈과 손을 붙인다 한들 눈에 보이는 그 신상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형체가 없는 영이시기에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온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개별적으로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이 예배당의 전깃불이 우리 모두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곳의 전깃불은 우리와 무관해 지고 맙니다. 전깃불은 이 예배당이라는 공간의 지배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전깃불과 달리 태양은 우리가 포항에서 부산을 향하면 우리를 따라 부산을 가고, 같은 시간에 부산을 출발하여 포항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들을 따라 포항으로 향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 태양은 우리 개개인을 따라다닙니다. 태양은 전깃불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크기에, 우리 개개인으로 따라다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땅 속에 들어가거나 밤이 되면 태양은 우리와 차단됩니다. 태양이 아무리 커도, 태양 역시 시간과 공간의 지배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양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개인이 어디에 있든 우리 개개인과 함께해 주십니다. 내가 황해 바다를 건너 베이징에 가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으로 나와 함께 동행해 주시고, 내가 아프리카에 가도 하나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며, 내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품고 계시고, 내가 망망대해를 홀로 항해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바다에서도 나를 인도하시며, 내가 천리 땅 속으로 떨어져도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나를 붙잡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형체를 지닌 분이셨다면, 그 형체가 아무리 눈부시고 거창해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소부재하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형체가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이시기에 하나님만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체를 지니지 않은 영이시라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어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된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영이심을 계시해 주시기 전까지, 모든 인간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신으로 섬기는 어리석음 속에 살면서도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자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 단절된 죄인의 한계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겨 제사를 지내려는 루스드라 사람들을 향해,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려는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태양과 비와 결싱의 계절을 주시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시기에 하나님을 알 수 없었던 바로 그 하나님을 믿으라고 역설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형체를 지니시지 않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심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헛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는, 눈에 보이는 그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이라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가나안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더 신봉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를 보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어야할 그리스도인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숭배한 적이 더 많았습니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예외인 것은 아님이 슬픈 현실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세상 사람들보다 더 좋아하고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절대로 참 믿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반드시 소멸하므로,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허망하게 자기 소멸을 앞당기는 어리석은 짓뿐입니다.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의 제물로 돌아가셨다가,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 승천하신 후 다시 영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영원하시기에,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안식과 영원한 평안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부귀영화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는 한때 처첩을 1천 명이나 거느릴 정도로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가 행복했을까요?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전도서의 첫머리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고 탄식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는 것은 결국 허망한 자기 소멸에 지나지 않음을 그 역시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섬기는 인생의 헛됨을 탄식한 그의 전도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라.”(12:13) 권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전도서는 한때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헛되이 섬겼던 솔로몬의 참회록인 동시에, 앞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결단의 서약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결코 우리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단지 수단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할,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는 것보다 자기 소멸을 빨리 재촉하는 헛된 인생은 없습니다. 영원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만 영원하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만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실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다. 그래서 본문 속에서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 바울은 고린도 후서 418을 통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아멘

 

祈禱)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는 것은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인데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신으로 섬기고 경배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체를 지녔다는 것은 그 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시간과 공간의 지배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심을 잘 알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는 헛된 일을 버리게 해 주옵소서.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만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하여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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