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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눈에 보이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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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y 06, 2018
  • 조회 4258

눈에 보이는 믿음

  안석수 목사 

*본문/ 14:8-12

 

소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작가이고 기괴하고 에로틱하면서도 종교적인 주제의 소설을 쓰는 현대 역사의 가장 유명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앤 라이스는 가톨릭 신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가톨릭 신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18세 되던 해 가톨릭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무려 30년 이상이나 무신론자로 살다가 50세가 넘어 다시 가톨릭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신앙은 되찾은 그녀는 예수님의 생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복원하는 소설을 썼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린 예수>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Christ the Lord>입니다. 그랬던 그녀가 나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기를 거부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앤 라이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는 별개로 투영된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로 불리는 간디는 기독교인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그리스도는 좋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싫다.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당신들이 믿는 그리스도와 너무나 다르다.”

간디가 싫어한 기독교인은 주로 그가 인도나 영국에서 직접 체험한 영국의 성공회 교인, 다시 말해 개신교인들이었습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미국의 소설가 앤 라이스는 앞으로도 예수 그리스도는 따르겠지만 더 이상 가톨릭교회에 남지 않겠다고 선언했을까요? 왜 인도의 간디는 예수 그리스도는 좋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은 싫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성경이 전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신구교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기독교인의 모습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전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기독교인의 모습이 같지 않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기쁨이란 단어는 추상명사입니다. 추상적이라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법적인 설명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쁨이란 단어 그 자체는 보이지 않는 추상명사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기쁨은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기쁨이 깃들면 그 기쁨은 어떤 형태로든 외부로 나타나는 까닭입니다

.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란 단어는 추상명사지만, 그러나 믿음은 반드시 보이기 마련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앤 라이스가 가톨릭교회에 절망하고 가톨릭교회를 떠난 것은 자기 눈으로 가톨릭 교인들의 믿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그리스도는 좋지만 기독교인들은 싫다고 말한 것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믿음도, 자신이 만난 기도교인들의 믿음도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행인이 외딴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지닌 것을 다 빼앗기고 피투성이가 된 채 길에 버려졌습니다. 그 곁을 시차를 두고 세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그 세 사람들이 각각 어떤 믿음의 소유자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그들의 믿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그곳을 지나간 사람은 제사장이었고, 그 다음은 레위인이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제사를 주관하고 성전 업무를 전담하는, 요즘 말로 성직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인적이 끊어진 외딴길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님을 스스로 보여 주었습니다.

세 번째 그곳에 나타난 사람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고 짐승처럼 경멸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피투성이 상태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의 상처에 포도주를 부어 응급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의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그날 밤 그의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도 그 사람이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사마리아인은 주막집 주인에게 돈을 지불하고 그 사람을 돌보아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추가 경비가 소요되면 자신이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갚아 주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음으로써 자기 믿음의 참됨 여부를 스스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그 사마리아인이야말로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그의 믿음을 보고, 또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사마리아인의 평소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평소 가정이나 일터에서 이기적이고 독선적이어서 자기도 모르게 주위 사람들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 주는 사람이었을까요? 만약 사마리아인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그가 그날 외딴길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가는 사람을 구출한 것은 크게 인심 한 번 쓴 셈이 됩니다.

세상에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으로 살면서도 어떤 행사나 단체에 상상치 못할 큰 거금을 희사한다거나, 별로 주요해 보이지도 않는 일에 엄청난 선물을 한다거나,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접대하는 등의 인심을 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전혀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살면서도 인심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인간의 찬사를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런 사람은 대부분 인간의 찬사가 없거나, 찬사가 수반될 수 없는 곳에서는 절대로 인심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사마리아인이 그런 사람일 수 없는 것입니다.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누가복음10을 통해 그 사마리아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그가 그 외딴길을 지나칠 때, 그곳에는 사마리아인과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가는 행인뿐이었습니다. 그 이외에는 그곳에는 단 한 명의 외부인도 없었습니다. 그 사마리아인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가는 행인에게 아무리 선행을 베풀어도 그에게 찬사를 보내 줄 관객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그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그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기분 날 때에만 인심을 쓰고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을 때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아무도 보지 않는 외딴곳임에도 피투성이로 죽어 가는 사람을 돌보아 주었고, 우리는 그의 참된 믿음을 우리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실체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조금만 가까운 사이면 다 알고 있습니다. 누가 참된 믿음의 사람인지, 누가 믿음보다 자기 기분대로 사는지, 누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믿음의 사람으로 사는지, 누가 사람이 보는 곳에서만 믿음을 좇는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의 믿음을 우리의 눈으로 보고 있다면, 중요한 사실은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의 믿음을 자기 눈으로 지금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입으로 말만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지금 어떤 믿음으로 보고 있을까요? 믿음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또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소설가 앤 라이스가 예수 그리스도는 따르겠지만 더 이상 가톨릭 교인으로 남지 않겠다는 것은, 그녀가 떠난 가톨릭교회 교인들이 자신에 거북하거나 껄끄러운 구절은 다 오려 낸 구멍 난 성경을 가졌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예수 그리스도는 좋지만 기독교인은 싫다고 한 것은, 그가 만난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엉뚱한 성경을 따랐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리고 새롭게 하는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세상으로부터 혹독한 비판과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우리 역시 성경에서 듣기 거북하거나 껄끄러운 구절들을 모두 가위질하여 구멍투성이인 성경을 신주단지 모시듯 끌어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대안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모든 교인과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아 가면서도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의 삶으로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우리는 거북하거나 껄끄러운 구절을 다 오려 낸 구멍 난 성경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동안 우리 입맛에 맞는 구절만 붙잡느라 성경을 우리 마음대로 구멍투성이인 누더기로 만든 잘못을 회개하십시다. 그 구멍 난 성경으로는 세상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자신도 살릴 수 없습니다. 그 성경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힘입을 수 없습니다. 이제 그 구멍 난 누더기 성경을 버리고,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온전한 성경으로 돌아가십시다. 온전한 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름으로, 우리의 참된 믿음을 세상과 하나님께 보여 드립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이 시대를 새롭게 하실 것이요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믿음은 반드시 눈에 보이는 구체적 실체임을 기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祈禱)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가혹할 정도로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우리가 먼저 세상 사람들에게 참된 믿음을 보이지 못한 결과요, 그 까닭은 그동안 우리 마음대로 우리 입맛에 따라 마구 가위질한 구멍 난 성경을 따른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온전한 성경을 따르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옵소서. 믿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반드시 눈에 보이는 실체임을 잊지 않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통해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세상 사람들의 눈에 우리의 참된 믿음이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다리가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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