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가치관으로
안석수목사
*본문/ 행 11:25-26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이후 이 땅을 거쳐 간 사람들 가운데, 이 땅에 오셨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직접 모신 사람들은 그 열두 명뿐이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아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수차례에 걸쳐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예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일랑 아예 귀 담아 듣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 하실 때, 능력의 예수님께서 지배자 로마제국을 몰아내고 반드시 집권하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 입성할 때에 누가 더 큰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다투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그 떡과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찢어질 예수님의 몸과 피를 뜻함을 일러 주셨건만, 제자들은 그때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흘러버리고 그 만찬 석상에서 누가 더 큰지를 서로 자랑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이시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아 곧 구원자시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단지 머리의 고백이었지, 마음의 고백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자신의 예상과 달리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게 끌려가시자 ,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면서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떨며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은 30냥에 예수님을 배신한 가롯 유다 역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
이처럼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의 곁에 있었지만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던 비겁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돌아 기신 이후에 도리어 예수님을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걸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현장에서 도망쳤던 제자들이라면, 그 이후에는 뿔뿔이 흩어져 예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예수님의 진정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댓가는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돌아간 것은 참수형이거나 화형, 또는 맹수의 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을 두고 도망치던 예전의 비겁한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칼날 아래에 목이 떨어져 나가면서도, 불에 타 죽으면서도, 맹수에게 찢겨 죽으면서도,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예수 부활을 외쳤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정말 부활하셨고,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정말 만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항상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들과는 달리,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을 한 번도 직접 뵌 적이 없었습니다. 열렬한 유대교 신봉자였던 바울은 예수님에 대하여, 예수님을 처형한 유대교 지도자들과 똑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빈민 주제에 하나님이라는 예수는 신성모독죄로 죽어 마땅한 대역 죄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무자비하게 핍박하는 일에 우두머리 역할을 자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어느 날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부정하고 대적하던 바울이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욕하던 그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대교의 관점에서 보면 유대교를 배신한 배교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맹신하던 유대교를 떠나 자신이 부정하던 에수님의 증인이 됨으로 인해 바울이 일생 치러야할 대가 역시 혹독하였습니다.
바을은 유대교를 등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시련과 고난과 박해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 무엇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바울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부활하셨고,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마스쿠스 길 위에서 분명히 만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바울과 동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에게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가치관의 변화 였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으로 태어난 바울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선민임을 나타내는 자랑스러운 표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배출한 베나민 지파였습니다. 바울의 본래 이름도 사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자신이 속한 베나민 지파에서 사울 왕이 배출되었음을 얼마나 큰 긍지로 여겼으면, 자기 아들에게 사울 왕과 똑같은 이름을 주었겠습니까? 또 바울은 유대교 내에서 가장 엄격한 종파인 바리새파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 최고의 스승으로 존경받는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일의 선봉장을 맡을 정도로 바울은 젊은 나이에 이미 유대교 내에서 탄탄한 입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당시 지중해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에 능통한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그가 지닌 모든 것은 유대교 내에서 그의 출세를 보장해 주는 막중한 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에게 그 모든 것은 한낱 배설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있어도 그만이요 없어도 그만인 삶의 수단일 뿐, 그것들이 자신을 구원해 줄 영원한 가치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에게 자랑이 있다면 오직 하나, 십자가뿐이었습니다.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려 주시기 위해 자신이 사망 형벌을 받으셨다가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만 영원한 생명을 위한 관문인 까닭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에게 나타난 두 번째 특징은 ‘순종’이었습니다. 바울의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순종은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바울의 삶은,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상황도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상황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고 계시기에, 자신에게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그 속에 주님의 뜻이 있고, 또 주님께서 그 결과를 책임져 주실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롬 8:18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 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처럼 바울은 주어진 모든 상황에 순종함으로써, 바로 그 상황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존재로 빚어질 수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바울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무려 13년간이나 고향 다소에 칩거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여기에 있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기대를 안고 유대교의 큰 지도자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바울이 어느 날 느닷없이 낙향하여 딱히 할 일도 없이 13년이나 칩거한다는 것은 그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그와 같은 바울을 영락없이 인생 실패자로 낙인찍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결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인생 실패자라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바울은 폐인이 되었거나 스스로 삶을 포기해 버렸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믿었고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자기 영혼의 불순물을 제거하시어 정금처럼 정제해 주시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 주님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심을 믿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으로 귀결되고, 주님 안에서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음을 굳게 믿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그 한결같은 믿음으로 바울은 13년에 걸친 그 기나긴 세월을 자기 성숙의 기회로 승화시킬 수 있었고, 그 결과 그는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바대로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울의 가치관이 변화되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순종의 삶이 그의 체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행 11:25-26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컽음을 받게 되었더라.
예수님께서 바나바를 통해 바울을 다시 말해 그 당시 바울의 이름인 사울을 안디옥 교회 공동 목회자로 불러내셨습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상황에 전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소 출신의 이름 없는 유대인에 불과했던 바울로 인해 인류의 역사가 새로워지는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부활하셨고,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오직 십자가의 가치관으로 순종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사흘째 되는 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다마스쿠스 길 위에서 완악한 바울을 부르시듯, 오늘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납시다.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 들입시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만 한 줌 흙으로 사라질 허망한 가치관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히 세워 주실 영원한 십자가의 가치관을 지닐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힘입어서만, 주어지는 모든 상황에 순종함으로 주님에 의한 새로운 존재로 빚어질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의 모든 절망은 소망의 관문이 되고, 우리의 모든 아픔은 참된 생명의 삶을 향한 발판이 됩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祈禱)
하나님 아버지,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영원한 십자가의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그 어떤 상황이든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난과 아픔이 주님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 또한 감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현재 당하는 우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감히 비교할 수 없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일평생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이 시대의 역사 속에서 아름답게 수놓아지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